한두 달에 한 번씩 진료 받는 아버님을 모시고 LA동부 필랜에서 밸리의 내 오피스까지 두어 시간을 운전하여 오는 따님이 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언제나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오는 따님이 안쓰럽기도 해 난 명의도 못되고 평범한 내과 의사에 불과하니 집근처의 의사를 새로 정하고, 장거리 운전의 수고와 위험성을 덜라고 충고했다. 그녀는 아버님이 거리가 멀어도 보던 의사를 계속 보고 싶어 하셔서 온다고 말했다.
베푸는 충만감의 힘일 것이다. 거의 말기의 심울혈증, 협심증, 당뇨의 여러 합병증이 있어 거동이 힘든 아버님의 원이라고 했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생명의 연장은 이루었지만 건강의 생기를 부어 주는 것 까지는 아직 못 미친다. 각 장기의 노쇠, 마모, 쇠잔으로 인한 약해짐은 해결이 안 되므로 노후에 사람들은 눈물겨운 고통 속에서 어려운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곁에서 돌보는 배우자나 자녀들도 그 감당하기 벅찬 삶의 투쟁을 공유하게 된다. 간병이 계속되면서 그들의 개인생활 리듬은 사라지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드는 경우도 종종 주위에서 본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간병의 원동력이 되는 정성과 베푸는 사랑도 점차 희석되기 시작한다.
이 아버님은 그 고통 속에서도 몸가짐이 항상 의연했다. 모두에게 감사해하는 마음이 진찰과정에서도 읽혀졌다. 아버지의 어진 인품과 늘 밝은 표정 따님의 변치 않는 정성어린 간병을 보면서 그들 부녀에게서 우아한 목련나무 꽃의 고귀함과 상큼한 향기 같은 것을 느낀다. 행위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사람을 외모·재산·학력·지위·업적에 따른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행위의 아름다움과 추함(부끄러움)으로 평가한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이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봄의 전령이라는 목련화가 질 때는 긴 시간 여러 날에 걸쳐서 꽃잎들이 하나 둘 차곡차곡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들로 바닥이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우아하고 기품 넘치던 모습은 흔적도 없다. 동백꽃은 일순간에 확 저버려 아쉬움과 허전함의 상처를 남긴다. 동백 꽃잎에 가슴이 빨갛게 멍이 든다는 가요 가사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목련화는 긴 고통의 시간을 가지면서 서서히 하나둘 간격을 가지고 사라진다. 남은 사람들에게 멍든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인가 보다. 우아하고, 품위 있어 아름다웠던 시간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남겨진 사람들은 못다 한 아쉬움과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의 후회로 슬픔을 가슴속에 담고 살게 된다. 오랜 병상에서 끈질기고 강인하게 생명을 이어 가는 환자는 고통을 참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아름다웠던 추억을 음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어 아쉬움과 후회, 슬픔을 덜어준다.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어 준 것이다.
긴 병을 돌보며 목련꽃의 피고 지는 과정으로 마음속에 다짐하면 간병의 과정도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아니, 아름다울 것 이다.
오늘도 오피스를 뒤뚱뒤뚱 거리며 나가는 아버님과 체격이 장대하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님을 작은 체구로 부축해주며 먼 길 돌아가는 따님의 뒷모습이 복도입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소로 배웅한 나는 목련꽃을 떠올리며 혼자 말한다. “긴 병에 효녀 있다”
한 여름 폭염 속에서 문득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목련꽃의 상큼한 향기가 나는 듯하다. 고통 속에서도 어진 아버님과 늘 상냥하게 간호하는 따님, 그들 부녀가 남기고 간 목련꽃 닮은 향기와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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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 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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