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점차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많은 신간서적들이 독자에게 손을 내밀지만 생각했던 만큼 썩 만족하게 다가가지 못한다. 시간에 쫓기는 경쟁적 사회생활 때문일까? 글로벌 시대의 너무 풍요롭고 편리한 문명의 혜택 탓인가. 모든 것이 디지털로 연결된다.
손끝만 까딱하면 문화, 오락, 요지경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즐길 수 있다. 요즘 어디가나 서나 앉으나, 위험한 차도를 건너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스마트폰 중독자를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도 이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고 하니 좀 심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한다. 즐겁고 재미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멋과 맛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아니면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50년대 전쟁의 후유증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문학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했으며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신간서적도 많이 나오지 않고 생활도 어려울 때라 많은 샐러리맨과 학생들은 번화가의 책방보다 뒷골목 헌책방을 누비며 헐고 낡은 책을, 새 책의 절반 값도 안 되는 헐값에 사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귀한 고서적도 헐값에 사서 읽을 수 있는 횡재로 큰 기쁨도 만끽할 수 있었다.
1951년도 부산에서 결혼을 하고 대청동 4가 달동네 단칸방에 달세로 신혼살이 할 때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전화도 없었고, TV는 물론 올바른 라디오도 없었었다. 그때는 전화나 음향기 제니스(Zenith)는 웬만한 집 재산목록에 들 정도의 귀중품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찍찍 잡음이 본체소리보다 큰 라디오로 간단한 뉴스와 연속극을 들은 뒤에는 달리 문화생활의 여가를 가질 수 없었다. 겨우 부부간의 의무적인 애정생활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무료했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이빨을 쑤시며 헌 구두 뒤축을 눌러 신고 집을 나서서 달동네 언덕길을 힘들지 않게 내려가다 좁은 샛길로 빠지면 바로 대청동 큰 길을 만난다. 전차 길을 따라 부산 도떼기시장(國際市場)을 왼쪽으로 하고 부산지방법원과 경남도청 쪽으로 세 정거장 정도를 걸으면 오른 쪽으로 보수동 1가가 옆으로 빠진다. 그곳에 부산에 유명한 헌책방 골목이 있다. ‘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142번지’ 골목이다. 입구부터 높은 양옥집 돌담 울타리에 무허가 건물들이 게딱지 같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몇 사람 함께 떼 지어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 책 가게에 덕지덕지 손때가 묻은 책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이곳에는 없는 서적이 없다. 교과서, 참고서, 사전, 문화예술, 논문, 문학전집, 빛바래고 세월의 이끼가 켜켜이 내려앉은 낡은 휘기귀서(諱忌貴書)들이다. 책장이 말리고 습기에 얼룩지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소설, 시집 등을 원가의 절반도 못 미치는 가격에 주인이 달라는 대로 건네주고 들고 와서 둘이 밤이 깊도록 읽게 되면 또 한 주일은 잘 보낼 수 있으며 이러다 보니 좁은 신혼방의 공간을 차지하는 게 헌책이었다. 생각 끝에 그사이 사다 본 헌책을 다시 사온 낡은 책방에 가져가면 또 몇 권의 책을 덤으로 받아 볼 수 있었다.
고난의 시기에 고마웠던 헌 책방골목의 난망!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멋진 난망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헌 책방에서 우리는 이상을 찾고 철학을 찾았다. 헌 책방을 운영한 서적 상인들에게 늦게나마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음의 고향과 같은 아련한 추억이 있어 30여 년 만에 부산에 간 길에 돌아보니 ‘옛 시인의 허사로다’ 그 자리는 높은 빌딩 숲으로 메워져 있고 멋진 추억의 난망은 찾아 볼 길 없었다. 세월이 맨발로 걸어온다고 해도 인생길보다 빠르니.
잊어버린 난망의 세월 시나브로 60 여년, 디지털 시대에 쫓긴 구순(九旬)의 들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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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주 전시사관학교 워싱턴전우회장 /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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