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면 대개들 그러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본다. 책상 한켠에는 뉴욕 시티에서 생중계하는 카운트다운 행사를 틀어놓고, 머릿속으로 지난해를 주르륵 훑는다. 지난해의 나는 어떠했더라. 그냥 그 지난 해랑 똑같았지, 뭐. 젊은 시절의 날씬했던 나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나잇살만 늘어나고,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건만 쏟아지는 사건 사고 속에 짜증도 늘었다.
그렇게 돌이켜 보니 나는 해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모자라고 성질 나쁜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해 말 내가 되려던 우아한 나는 어디로 갔을까. 우아한 건 태어나길 우아하게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렇다치고, 이 두터운 배둘레 삼겹살은 어쩔거야.
돌이켜볼수록 못난 나를 책망하며 다시한번 새해의 다짐을 적어본다. 올해는 정말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살아봐야지. 올해는 한 달에 책 한 권은 읽어야지. 올해는 데면데면한 이웃집 미국 영감님과 프리 토킹을 해봐야지. 덧붙여서 고급스런 취미생활도 하나 시작해야지. 와인을 모아볼까 골프를 시작해 볼까. 날씬하고 정갈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를 설계하면서, 실제의 나는 경멸받고 무시당한다. 버리고 싶은 어제의 껍질처럼.
연초마다 새해의 결심을 써내려가고 연말에 좌절하는 우리를 위해 로버트 풀검이라는 에세이스트가 내린 명쾌한 처방이 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라는 책으로 유명한 풀검 역시 연말이면 이루지 못한 지난 해의 소망에 묻혀 괴로워했단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올해 내가 이룬 일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는 지난해에 이룬 일들을 쭉 적어 내려가고 그 위에 지난해의 연도로 ‘올해의 소망’이라고 적었단다. 그랬더니 이럴수가. 목표 달성 100%. 나처럼 뛰어나고 멋진 사람이 없더란다.
좋은 건 따라해 보자. 지난 해 이룬 일을 꼽아보자. 피곤해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싶을 때도 아침은 거르지 않았다. 어쩌다 동네 한바퀴를 걸을 때면 눈에 띄는 풀꽃들을 찍어다 카톡 프로필 사진도 갈아줬다. 뿐인가. 도통 방정리를 하지 않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10번 하고 싶을 때 8번밖에 하지 않았다. 배우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갈 때 5분에 한 번씩 소리 지르고 싶은데도 20분에 한 번씩 하느라 가슴이 아팠다. 한 달에 한 권 책은 못읽었지만 어쩌다 집어든 신문은 앞뒷장 빠짐없이 읽었다. 이렇게 적어보니 나도 꽤 교양있고 감성적이고 남을 배려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닌가.
이왕 시작한 자화자찬, 한 걸음만 더 나가볼까. 종이 한 장을 더 꺼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능력들을 한번 적어본다. 나는 요리는 맛나게 잘하지 못하지만 설거지는 누구보다 뽀득뽀득 잘 한다. 앞마당에 예쁜 꽃을 피우지는 못하지만 뒷마당 낙엽 청소는 시원하게 할 줄 안다. 숫자에 약해 가게 장부를 적는 것은 좀 서툴지만 손님맞이는 싹싹하게 잘한다. 좋은 와인을 고르는 안목은 없지만 수많은 맛집 평가 속에서 진짜 맛 집을 가르는 눈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내가 감지한 내 능력이 열 가지 정도 된다면, 내가 모르는 능력도 열 가지 정도 되지 않을까. 이제껏 적어놓은 리스트 밑에 빈 칸을 열 줄 정도 남겨 놓고 맨 윗줄에 적어본다: 이 외 다수. 개발 중임.
2019년의 시작. 이순신 장군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었다는데 우리에게는 한 장의 리스트가 있다. 모쪼록 올해 끝에는 빈 칸 열 줄 말고도 또 다른 한 장의 리스트가 남아있기를.
(703)76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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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상담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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