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온돌방에 의지하며 방문을 꼭꼭 닫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내가 자란 도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칼바람이 부는 날은 살을 에는 듯 추웠다.
음력 설날이 오면 엄마는 전날 밤 물에 불린 쌀을 큼지막한 다라이(대야)에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서둘러 ‘칠성’ 재래시장을 향한다. 꽤나 먼 거리를 걸어서 그 당시에는 ‘굴다리’라 불렀던 지하도를 통해 밖으로 나오면 곧바로 큰 시장에 이른다.
상가 앞에 명절 대목을 노리고 아주머니들이 땅바닥에 가지가지 제수용 나물들을 발 디딜 틈 없이 펴놓으면, 어린 내 눈에는 없는 것이 없다. 어물전에는 말린 건어물과 싱싱한 생선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도 값 비싼 조기랑 사각형으로 썰어 소금에 절인 돔배기(상어 고기)는 특히 제사 때만 구경하던 별미지만, 밋밋한 맛과 특이한 냄새로 멀리한 기억이 남는다. 이때쯤이면 엄마는 설을 맞을 채비로 엉덩이 붙일 여가가 없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는 시장 안에 있는 떡 방앗간 풍경이다. 엄마를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떡 방앗간 앞에서 떡가래를 빼려 장사진을 치고 있는 아줌마들 틈에 내가 엄마를 대신해서 줄을 서야 하기 때문이다.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입어도 몸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을 이겨낼 수 없을 때 쯤에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방앗간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방앗간 안에는 팥고물을 켜켜이 얹어 찌는 가마솥에서 시루떡이 익느라 하얀 김이 유리창을 통째로 뒤덮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윤기가 자르르한 흰 가래떡이 기계의 동그란 구멍을 통해 길게 뽑아져 나오면 가위로 싹둑 잘라 서로 붙지 않게 대야 가득 담아 놓는다.
사방에 풍성한 떡이 널려 있으니 창밖의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이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따라 나온 내가 기특했던지 길다란 떡가래를 쥐어주고 따끈따끈한 시루떡도 성큼 찢어 손바닥에 얹어준다. 지금 마트에서 팔고 있는 시루떡과 썰어 놓은 가래떡을 종종 사 먹으면서도 어찌 옛날의 그 맛과 비교 할 수 있으랴.
장날이 끝날 무렵 엄마는 손수레 아저씨를 찾느라 석양이 지는 시장 안을 이리 저리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왜 그리도 힘겨워 보였는지.
지금은 거리에 택시도 많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기만 해도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고 절로 빨아지고 말려지는 세상인데, 한 지붕 아래 대식구들이 북적이며 내어놓는 빨래며, 열악한 부엌살림까지 쉬운 것이 하나 없었던 고달픈 일상이 당시 주부들이 겪었던 한 많은 역사가 아니었을까?
60년대 초 어린 동심의 눈에 비춰졌던 음력 설 ‘칠성 시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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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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