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친위대가 버스를 정차시키고 올라와 외쳤다. “한 사람도 움직이지 마시오. 신분증 검사합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시프라(Shifra)라는 중년 여인은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있던 중년 신사가 물었다. “부인, 왜 그렇게 두려워 떠십니까.” “제겐 신분증이 없습니다. 전 유대인입니다.” 시프라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그때 그 중년 신사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시프라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며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이 멍청하고 한심한 마누라야, 내가 정말 미치겠다. 미치겠어.”
나치 친위대원이 왜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냐고 물었다. “아니 제 마누라가 신분증을 또 잃어버렸다내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년 신사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친위대는 중년 신사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바탕 웃고 지나갔다.
그 신사는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혜와 자애를 갖춘 ‘고엘러’(goeler)였다. 시프라는 그 이후 다시 한 번도 그 신사를 보지 못 했다. (하워드 슈발츠의 ‘Palace of Pearls' 중에서)
-고난당하는 형제를 보호하고 책임지라는 '고엘(goel)' 명령을 이스라엘 사람은 어디서나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룻기의 보아스를 보라. 더 가까운 친족이 있어서 법적 책임이 없었지만 보아스는 자애에 근거한 자원의 고엘이 되어주었다. 끊어질 번 한 가문을 위해 ‘축복의 전달자’가 되는 역할을 보아스는 놓치지 않았다. 흔들리는 가족의 결속을 도와준 일 때문에 보아스는 예수의 족보를 잇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지옥을 ‘타자가 없는 상태(Hell is the absence of other people)’ 라고 정의한다. 소련의 어느 노동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글릭스만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재소자가 나에게 소금 한 줌을 건네주었다. 나는 이 소금을 고깃국 속에 넣었다. 고기가 다 익자 나는 소금을 준 그 재소자를 불러 함께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재소자가 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고엘 정신은 공동체 번영과 생존의 깊은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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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 목사·AG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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