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살짜리 손녀가 있다. 참 잘 먹는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만날 때 가끔 신선한 충격을 준다. 나와 아직 미혼인 막내아들을 유난히 좋아하며 따른다. 꼭 막내아들과 나의 안부를 놓치지 않고 묻는다. 어쩌다 아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어린 손녀는 아침부터 미리 창문을 활짝 열고 기다린다고 한다. 막내아들이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아빠 미소를 짓는 손녀를 본 적도 있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정답게 만들까 하는 궁금증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루는 페이스타임으로 전화를 하는 데 많이 예뻐진 모습을 발견하고 물었다. “진아야, 왜 이렇게 예뻐졌어?” 전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답한다. “할머니가 좋아서요.” 순간 그 말이 내 마음의 꽃밭을 활짝 피게 한다.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라는 동요도 입에서 나오려고 한다. 아, 충만하다! 그런데 난 짓궂게 또 물었다. “할머니가 왜 좋아? “이번에는 더 빨리 대답한다. “사랑하니까요.” 와! 이보다 강력한 충격(임팩트)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현상은 아직도 그 강렬한 울림이 나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책에서 배운 대로 ‘왜’라고 질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무례하게 ‘왜’라고 어린 손녀에게 물었다. 그 대답은 의외로 큰 선물이 되어 나에게 주어졌다. 내 이름의 뜻처럼 은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달콤한 숨결이 어린, 사랑의 밀어(words of so sweet breath)”인가? 아니면 생명의 숨결이 말이 되어 나에게 왔나? 나는 언어에 의해서 생명이 전해짐을 다시 한 번 크게 느꼈다.
나태주 시인의 시 ‘좋다’가 손녀의 말을 통해 직접 내게 와 주었다. “좋아요/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My heart leaps up 또는The Rainbow)’는 내가 어릴 때 배우는 순간부터 나를 떠난 적이 없는 시다. 특히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이 귀절이 나에게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열어 주었다. 아이들에게서 전해지는 엄청난 생명력은 언제나 나에게 스승이다. 더 나이가 든 손주들과 놀 때에도 이러한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라 부르며 놀기도 한다.
<이혜은 (우리 앙상블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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