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 것인지 잘 분간 못할 때가 있다. 언제는 그것이 정의롭고 언제는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명이 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이라는 기준에서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정의도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전체적으로는 맞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이유는 행복과 자유, 그리고 미덕이라는 기준이 시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 자유의 한계, 그리고 미덕의 항목이 문화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의 기준은 어느 정도 모든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에 있어야 한다.
정의의 기준과 수준이 낮게 되면 그만큼 사람들의 삶의 질과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정의의 방법을 위해 택한 방법이 민주적인 방법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반영한다는 것이다. 민주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권한을 주는 것이 민주적인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인 방법은 그 결과가 숫자로 결정짓게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라고 했을 때 정의는 숫자로 결정짓게 된다.
그 숫자는 공리를 반영해야 한다. 많은 숫자가 그렇게 결정한 것은 전체의 이익을 만들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를 결정지을 때 그 결정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기준은 다수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힘의 정의이다. 많은 사람이 결정하면 그것이 정의이고 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공리를 앞세워야 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과 자유, 미덕을 세워야 한다. 이런 절치와 과정을 부정하면 민주적이 되지 못한다. 민주적이지 못한 사람은 독보적이거나 독재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다수의 힘의 민주가 진정한 정의인가 판단하는 것은 오직 역사뿐이다.
역사를 보면 민주적인 방법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 모두가 다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수가 지지하는 독재자의 결정이 결국 많은 사람의 희생을 낳았던 과거 역사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의는 다수의 힘만으로는 정의를 모두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세조를 다시 폐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다 결국 사형 당하거나 죽음을 선택했던 당시의 여섯 신하들은 역적이었다. 그러나 150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의 관직이 회복 되었다. 그들은 충성스런 신하로서 조선역사에 남게 되었다.
성경에 말씀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태복음5:15)
정의는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언제든지 드러나게 마련인 것처럼 정의는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잠시 잠깐의 정의와 불의의 판단은 뒤로 미뤄두고 기다림의 인내를 가져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선거의 후유증이 머물고 있는 이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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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 워싱턴 동산교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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