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1년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는 절친인 칸딘스키와 함께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지만 그의 그림은 아직도 바우하우스에서처럼 살아 문득 우리 삶에 질문을 던지고 해학과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파울 클레에게 있어 캔버스는 하나의 음악을 그려넣는 음악적 회화였다. 그에게 화폭의 색채는 멜로디와 분위기와 같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붉은 푸가’와 ‘황금 물고기’는 내게 두개의 동떨어진 그림이 아닌 하나의 오페라로 다가오던 순간이 있었다.
황금 물고기는 빛나며 붉은 푸가는 춤을 춘다. 동일한 동작이 정렬을 달리하며 푸가처럼 반복된다. 붉은 옷을 입고 정갈되게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린 무희들의 발놀림이 빨라지고 늦어짐을 반복했다. 그것은 실제 모습이 아닌 그림을 보며 느끼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붉은 푸가가 오페라의 서곡처럼 그림을 그려 놓은 자리에 다음 무대로 주인공인 황금 물고기가 등장했다.
검었던 바다에서는 여러 물고기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이때 잠수부가 불빛을 비추자 다른 물고기들은 침입자의 위협을 느끼며 황급히 캠퍼스의 모서리로 머리를 돌리는 듯 보였다. 반면 그들이 눈부심에 방향을 잃고 있는 동안에도 황금 물고기는 어디로 갈지 알지만 서두르지 않는 유영을 즐기는 것 같았다. 황금 물고기의 눈빛은 선명했다. 황금물고기는 파울 클레의 그림인 붉은 푸가가 오페라로 상영되는 동안 맨마지막에 울려퍼진 아리아였다. 황금 물고기의 유영, 색들은 살아나고 평범했던 물고기는 황금 물고기가 되었다. 그림들은 한 편의 오페라였다.
황금 물고기가 그토록 빛났던 이유는 그의 말처럼 누구나 보지만 보아내지 못하는 것을 예술로 보게 하는 클레의 특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형용색색의 그림을 색칠한 후 다시 그 위에 까만색 크레파스로 캔버스를 모두 암흑으로 만든 후 칼로 긁어내며 나만의 그림을 완성시켜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러한 스크래치 기법은 검은 공간 아래 갖가지 색을 숨기고 있었기에 보물찾기를 하듯 숨겨진 색들을 발견해 나가던 기쁨이 있었다. 파울 클레의 ‘황금 물고기’에서 보이는 수초와 황금색으로 빛나는 물고기는 우리에게 어느 날 암흑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곳엔 우리가 살아가며 발견할 보물들이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다고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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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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