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은 후 가슴에 종양이 있다는 서늘한 통보를 받은 적이 있다. 의사는 지켜보겠다지만 암은 죽음이라 생각하던 시절, 시시각각 조여 오는 초침소리를 들으며 나는 밤새 관에 누워 누가 왔나 둘러보고 묘비명 짓느라 애도 썼다. ‘뭐부터 하지?’ 조바심을 내던 중 곧 할 일을 알았다.
시부모님과 살며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며 애 셋 낳고 키우면서 비즈니스까지 했으니, ‘맞아, 내가 언제 나를 위해 한 일이 있던가?’ 여행은 시간, 돈, 건강이 갖춰져야 하는데, 젊은 나이에 건강 때문에 내 소박한 꿈조차 못 이루고 간다면 한이 될 것이다. 나는 서둘러 여행사에 연락해 제일 먼저 떠나는 일정을 잡고 내 생애 마지막 외출을 서둘렀다. 죽는다는데 토 달 사람은 없었다.
11월 유럽여행은 비수기라 여행객은 노부부와 신혼여행 온 젊은 부부, 대학생 한 명과 나 이렇게 6명으로 영락없는 한 가족이었다. 고색창연한 역사와 문화의 충격과 감동은 기대 이상이었고, 15일 강행군 일정 달리는 길 위로 부서지는 햇빛과 오렌지 빛 노을은 고왔다. 국경을 넘는 긴긴 밤 내내 차창으로 들어차던 별빛은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된 듯 여유를 찾게 했다. 여행과 병의 공통점은 자기반성이라더니,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참회하며 깊이 생각하는 시간은 오히려 힐링이 됐다. 준비 없는 이별이라고 눈물이나 뿌렸을 시간에 나는 죽음을 사색하며 남은 삶을 잘 마무리하려는 중무장을 했다.
돌아온 탕자 버금가는 환대 분위기와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 의사의 전화를 받았다. 오진이래나 뭐래나? 안도감보다 먼저 떠오른 말은 ‘구경 한 번 잘 했네!’, 웃을까 말까 망설이는 남편 앞에 빛의 속도로 공손해진 나는 다행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은 소동파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후 초라한 몰골로 시골길을 걷는데, 한 노파가 “지난날 부귀영화는 그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구려?”라고 한데서 유래했다. 이제 암은 죽는 병이 아니고 유럽여행 못 갔다고 한 맺힐 시대도 지났지만, 그때 지구와 함께 나 자신도 한 바퀴 돌아보며 내 선 자리를 확인했다. 인생의 부귀가 덧없음을 비유하는 일장춘몽, 억지 춘향으로 이룬 꿈은 내 인생여정을 토닥거리며 삶의 고비마다 ‘무엇이 중한디?’를 묻는 한바탕 자명종으로 현실을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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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북산책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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