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코로나 난리통에 한국을 다녀왔다. 아버지께서 마지막 같다고 하시는 말씀에 놀라 급하게 비행기표를 끊었다. 가는 동안 아버지는 중환자실로 들어가시고, 나는 친정집 안방을 차지하고 2주 자가격리를 했다. 기관지 약하신 엄마에게 혹시라도 누를 끼칠까 걱정돼서 수저에 컵에 식기까지 갖고 들어와 살림을 차렸다. 실내용 자전거까지 끌고 들어와, 운동도 거르지 않았다. 밤이면 영화도 한 편씩 보고 나름 슬기로운 자가격리 생활을 했다.
무료함에 지칠 때쯤, 서랍장 구석구석을 들춰보았다. 아버지, 엄마 젊으셨을 적 사진부터 가족여행 사진 등을 보며 혼자 배시시 웃는다. 그러다 엄마의 반짇고리를 발견했다. 어릴 적부터 봤던 자개로 장식된 실패와 닳고 닳은 통나무 실패들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음을 겸손한 모양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불 홑청을 빨아 골무를 끼고 바느질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꺼운 솜이불을 마치 시침질하듯 술술 바느질하셨는데, 이제는 신문을 읽을 시력도 되지 않으시니 바느질은 엄두도 못 내신다.
엄마는 뜨개질을 참 잘하셨다. 덧버선부터 조끼, 스웨터, 모자까지 다 떠서 입히셨다. 엄마가 떠준 분홍색 모자와 무늬가 많이 들어간 조끼도 생각난다. 사람들이 조끼 입은 나를 세워놓고 어떻게 뜬 건지 찬찬히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엄마의 손길이 몇천 번은 닿았을 뜨개질바늘은 윤기마저 없어 보인다.
바느질하는 엄마의 모습은 햇살 가득한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등도 굽지 않으시고, 활발하신 젊을 적 모습으로만 떠오른다. 그런 엄마였는데, 지금은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신단다.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고 밥을 해놔야 한다며 밥통도 없는 데다 쌀을 부었다고 요양보호사한테 연락이 왔다. 엄마는 다른 기억은 사라져가도 밥을 많이 했었던 기억은 남아있나 보다. 아버지 제자들까지 도시락을 11개를 쌀 때도 있었고, 손님치레도 많이 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 싶다가 또 눈물이 차오른다. 고생하신 것이 더 기억에 남나 싶어서, 그 시절을 혼자 견디게 해 드려서...
엄마 곁에 가서 괜찮다고, 괜찮다고 다독다독 말이라도 건네 드리고 싶은데, 내 살림을 접고 떠나는 일이 쉽지 않다. 엄마 반짇고리 속, 윤기 없던 실패와 대바늘이 자꾸 떠오르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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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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