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2015년 원전의존도 70→50% 줄였지만 원자력 대안 못 찾고 다시 원전으로 복귀
▶ 마크롱, 68조 들여 신규 원자로 6기 건설…탄소 저감·원전 경쟁력 확보 동시에 챙겨, EU도 각국 상황 맞춰 ‘원자력 자율성’ 인정
우크라 사태에 엇갈린 에너지 안보 전략유럽 에너지 시장에 새로운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시장은 주된 공급원인 러시아를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북해의 바람이 멈췄다. 풍력발전량은 급속히 떨어졌다. 에너지 위기는 다시 화두로 등장하고 녹색 전환의 포스터 뒤에서 여러 에너지원은 새로운 균형점을 찾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의 신규 원전 건설 발표는 후쿠시마 사태 이후 지속돼온 유럽 탈원전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EU)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에 원자력이 포함된 것도 이 같은 선회가 일시적이 아님을 확인시켜줬다.
원전 주도국으로서 프랑스의 위상은 지난 2010년대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원전 시장이 위축되면서 유럽의 탈원전 흐름도 거세졌다. 사회당 출신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원전 축소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2015년 프랑스 의회는 원전 의존도를 70%에서 50%로 낮추기로 결정했다. 노후화된 원자로 12기의 폐쇄 방침도 발표됐다. 동시에 프랑스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유럽형가압경수로(EPR)도 난항을 겪었다. 2012년 완공 예정이었던 플라망빌 원전은 계획보다 10년 이상 지연되며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핀란드 올킬루오토 원전 건설도 연기되며 막대한 금융 비용과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프랑스 원자력 산업의 양대 축으로서 사업을 담당한 아레바는 결국 프랑스전력(EDF)에 흡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렇게 프랑스 원자력의 전성기는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원자력의 대안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2019년 원자력 비중 축소 계획을 오는 2025년 이후로 연기했다. 2020년으로 접어들며 새로운 원전 정책의 기조가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2년간의 연구를 거쳐 발표된 ‘에너지 미래 2050’ 보고서는 원자력 에너지의 필요성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월 10일 500억 유로(약 68조 원)를 투자해 2050년까지 신규 EPR 원자로 6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최대 14기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또 소형모듈원전(SMR)에 10억 유로를 투자해 2030년까지 원형 모델을 개발하는 동시에 폐기물 처리 기술을 개선하기로 했다. 노후 원전의 수명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40년에서 50년으로 연장이 가능해졌다.
왜 프랑스는 원전으로 선회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탄소 저감의 필요성이다. 원자력 없이는 2050년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프랑스는 안정된 저탄소 에너지원이 필요했다. 또한 프랑스의 원전 증설 계획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발표됐다. 기후변화에 맞서 프랑스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라는 두 개의 방패를 들기로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원자력 산업의 경쟁력 제고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프랑스와 유사한 원전 규모를 가진 중국은 향후 150기를 추가 건설할 계획이며 러시아 역시 주요 원전 생산국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원자력 기술 표준이 중국과 러시아에 주도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프랑스가 미온적 입장을 보인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기술적·제도적 우위를 급속도로 상실할 수 있다. 특히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EDF사에 충분한 재원을 제공해 원자력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원자력 산업의 재탄생”을 주창하며, 특히 신규 핵심 인력에게 미래가 있음을 보여줄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원자력 에너지는 단순한 발전원 이상의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원전을 통한 에너지 자립 강화는 안보 및 군사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원자력 기술은 고도의 전략재다. 원자력 지정학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원자력은 안보와 수출, 기술이라는 차원에서 민감한 정치적 자산이다. 나아가 원자력은 핵 보유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유지해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원전 선회는 현재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에 기반하고 있다. 중도 진영의 마크롱 대통령뿐 아니라 중도 우파와 극우파도 친원전 정책을 지지하며 사회당 역시 원전에 강한 반대를 표명하지 않는다. 원전 지지 여론은 천연가스 가격 급등과 재생에너지원의 공급 불안을 반영하며 최근 2년간 17% 증가했다.
EU는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단일한 지침 대신 각국이 상황에 맞게 사용하며 탄소 저감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슬로베니아·슬로바키아·핀란드·헝가리·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크로아티아 등이 원자력을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왔고 영국도 SMR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룩셈부르크·덴마크·포르투갈·스페인 등 탈원전 국가들은 위장환경주의(그린워싱)를 우려하며 원자력 사용에 대한 보다 엄격한 규제를 주장하고 있다.
독일은 녹색당이 연정 파트너로 들어온 신정부에서 견고한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며 2022년 원전을 폐쇄할 예정이다. 그러나 탈원전은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화석연료 비중과 탄소 배출을 단기적으로 증가시켰다. 녹색당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50%에서 80%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나 에너지 가격 인상을 제한하는 정책과 상충할 우려가 있다. 또한 천연가스 공급 확대를 위해 추진했던 노르트스트림2 파이프라인은 러시아와의 갈등 상황으로 개통이 불확실해졌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떠난 후 약화된 외교적 위상과 더불어 가스에 한쪽 손이 묶인 독일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기대했던 중재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는 유럽의 에너지 안보 문제를 다시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혈관처럼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르는 가스 파이프라인은 전쟁과 공급 중단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켰다. 주력 에너지원을 외부에 의존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성은 상존한다. 재생에너지 공급이 가까운 미래에 충분히 안정적으로 이뤄질지에 대한 불안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원자력 에너지의 필요성이 유럽 내에서 새로 제기되고 있다. EU 분류체계에서 폐기물 처리와 사고 저항성 연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제시됐지만 원전을 유지하려는 회원국들은 기술적·제도적으로 해볼 만하다는 입장이다.
프랑스의 원전 선회 정책이 글로벌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각국이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탄소 중립 전략에서 화석연료와 재생에너지를 이어줄 교량으로서 원자력의 필요성은 보다 현실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비전으로서의 녹색 전환은 이제 실행의 시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무엇보다 확고한 우선순위 설정이 필요하다. 탄소 감축을 핵심 목표로 정할 경우 원자력과 천연가스는 적어도 교량 에너지원으로 인정받는 우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탈원전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재생에너지 외에 다른 대안이 촘촘히 제시되지 않을 경우 실행 단계에서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탈원전과 탈석탄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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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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