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일곱살 때 입양돼 온 김영신씨
"어머니의 얼굴도, 한국말도 모두 잊어버렸지만 꼭 한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일곱 살 때 미국에 입양돼 47년 동안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그리며 살아온 김영신(54, 미국명 에스더 렉스포드·사진)씨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처절한 슬픔이 깊어만 간다. 한인사회와도 단절돼 살아온 생애였기에 한국말이라곤 자신의 이름과 몇몇 단편적인 단어만 기억할 뿐인 김씨.
1949년경 자신이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는 김씨는 생일도, 출생지도 모른다. 다만 어머니의 이름이 김옥자였다는 것. 그리고 바로 아래 동생이 김부홍이었다는 것만 또렷한 한국말로 발음했다.
북한에서 태어난 김씨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린 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월남했다. 북한에서 2층집에 살만큼 유복했던 어린시절도 빈손으로 서울로 피난 온 후에는 가난했던 기억뿐이다. 외삼촌과 이모집에 맡겨져 영등포와 인천,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시골을 전전했던 김씨는 영등포의 해방교회에 출석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20대 초반의 매우 젊었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김씨를 비롯한 세 자매의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입양을 결정했다. 1959년 김씨는 입양서류에 가족사항이 모두 삭제된 채 괌에 거주했던 얼 메릴과 유파 메릴씨 부부에게 입양됐다. 또 당시 다섯 살과 두 살로 추정되는 두 여동생도 미국의 다른 가정에 각각 입양돼 뿔뿔이 흩어졌다.
자녀가 없던 양부모는 김씨와 함께 1962년 버클리로 돌아왔다. 엘세리토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레곤과 캔사스주 등지에서 거주했다. 영국인 남편과의 사이에 32살 아들과 16세 딸을 둔 김씨는 제2의 고향인 버클리로 돌아와 줄곧 살고 있다.
입양 후 딱 한번 김씨는 22살이던 1972년 한국을 방문해 적십자사를 통해 어머니를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 당시 한국말도 할 줄 모르던 김씨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중년이 지난 나이에 다시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고 있는 김씨는 "살아 계신다면 일흔 중반이 훨씬 넘으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꿈속에서도 떠올리기 힘든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김씨는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어머니를 그토록 보고싶었다고 말하고 싶다"고.
김영신(에스더 렉스포드)씨의 연락처는 510-540-9921.
<한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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