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로 부터 소포가 왔다. 햇 차가 나왔다며 녹차 몇 통 하고, 중국에 잠시 갔을 때,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샀다는 작은 다관 하나, 그리고 광목으로 누벼 만든 천에 수련이 물 속에서 막 피어오른 자수가 새겨진 방석 두개와 아침 저녁으로 마음을 맑히라고, 천연재료로 만든 향 몇 통을 보내왔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리움이 막 밀려온다. 햇 차가 나올 무렵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하루 종일 화개골을 다니며 그 해의 차 맛을 음미하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입안에 온통 다향이 그윽하여 한호흡 한호흡이 감미롭다.
어느 해 인가는 햇차가 나올 무렵 지리산 까지 내려가지 못 하였는데, 그 친구가 그날로 불원천리 강원도 나의 산방 까지 차 한통을 들고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밤새 댓바람 소리 들으며 차를 마셨다.
오늘은 샌프란시스코 작은 집에 앉아 햇차를 우린다. 맑은 빛깔이 봄 산의 푸른 빛을 머금었고, 풋풋한 향기에 허리가 절로 곧아진다. 그리고 차 한모금 머금으니 지리산의 맑은 기운이 온 몸으로 쏟아진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러운 아침. 솔바람 불러다 솔가지 꺽어 화로에 불을 지피고, 다동이 길러온 신선한 샘물로 차를 우리는 그런 운치는 못 되더라도, 홀로 앉아 마시는 차맛이 가히 아취가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남도 유배지 에서 초의선가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인편에 빨리 보내 주기 바라오.
초의 혼자서만 돌샘 솔바람 사이에서 햇차를 마시고
멀리 고생하는 나를 걱정하지 않으니 삽십방을 맞아야 하겠소."
햇차가 나오기를 고대하던 추사가 때가 지나도 차를 보내지 않는 초의선사에게 익살 넘치는 편지를 통해 햇차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다산, 추사와 함께 시·서·화 삼절로 꼽히는 조선 후기의 차의 달인 초의선사는, 온 세상이 사대사상으로 차 마시기를 망각했던 시절에, 끊어져 가던 우리 고유의 차를 다선집 이나 지각있는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세간에 알렸고, 차 마시는 일과 선을 참구하는 것이 둘이 아닌, 평상심이 곧 참다운 공부임을 다선일여로 일갈했다.
투정 섞인 서신을 보내지 않아도 해 마다 잊지 않고 보내주는 지리산 바람 한줌 으로 인해 내 삶이 살아 맥박친다.
그러면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시원한 산바람 한줌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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