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성장기·가정환경 극복
전투중 한쪽 눈 상실… 그림에 몰두
몇 해 전 중풍으로 쓰러진 해리 서(81·한국명 해영)씨는 아직도 몸을 자유롭게 가누지 못하고 팔뚝에는 검버섯이 잔뜩 핀 평범한 할아버지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 깊이 배어있는 말투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찬 눈빛은 그의 삶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어두운 성장기를 보낸 그는 결혼 생활에도 실패했지만 2차대전의 영웅이며, 뛰어난 화가였다. 어쩌면 우울한 가족사가 그의 군 생활과 작품세계를 지탱해 줬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하와이에서 멕시코를 거쳐 LA로 입국한 어머니 매리 김 여사는 도박에 빠졌던 생부 김지선씨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 곳 저곳을 돌아다녔고, 네 명의 남자와 살았다.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남편 성을 따라 서씨가 됐다. 가족과 함께 딜레노에 정착한 서씨는 한시대 선생의 농장에서 생산된 작물을 LA와 샌프란시스코로 배달하며 생계를 도왔지만 가난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내기 위해 군에 입대했고, 그 곳에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서씨는 미 특수부대 요원으로 북아프리카와 시실리, 이탈리아 지역 전투에 투입돼 뛰어난 공을 세웠다. 1943년 이탈리아 살라지방 전투에서는 홀로 적의 고지를 점령하는 용맹을 보였지만, 대가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
미국 정부는 은성무공훈장, 보병전투장, 명예전상장 등 11종류의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공로를 인정했지만 서씨는 “그 때 나는 어렸고 참 멍청한 짓을 했다. 이 것들은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한 멍청한 보상”이라며 훈장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1년 반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군복을 벗은 그는 전역군인을 위한 직업상담소를 찾았다.
서씨의 예술적 재능을 눈치 챈 상담원은 초나드 아트 스쿨(현 오티스 예술대학) 진학을 권했고 그는 졸업 후 잠시 동안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학교를 그만 둔 뒤에는 건축업에 투신 오렌지카운티에서 루핑 전문회사를 두 곳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사업에 몰두하면서도 총을 대신해 잡은 붓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99년 중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꾸준히 한 달에 작품 한 점 정도씩을 완성했다. 서씨는 화가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만족해했다.
“그래도 꽤나 이름이 있었죠. LA카운티 박물관을 비롯해 베벌리 힐스, 라구나 비치, 윌셔, 샌타 바바라 등 남가주 전연의 화랑에서 수십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으니까요.” 그의 그림은 1940년대에도 최소 150달러 이상에 거래됐다. 스티븐스 랜치에서 딸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서씨는 두꺼운 시가를 벗삼아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티모시 서 전 경관과 더글라스 서 램파트 경찰서 부서장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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