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릉 따르릉. 고요함의 정적을 가로지르면서 벨 소리가 침입해온다.
이 밤중에 누구일까? 영숙은 컴퓨터 앞에서 타이핑하다 일어나 거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너 아직 안 자고 있지? 카랑카랑한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와 영숙의 귀청을 울린다.
너 내일 해정이와 점심 먹으러 올 거지? 응. 간다고 했잖아. 그래 다시 확인해 봤어. 그럼 내일 보자. 잘자.
짤각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영숙은 수화기를 멍하니 바라본다. 실리콘밸리에서 ‘순 된장 집’ 식당을 시작한 은희다. 교육에 뜻을 두고 한때 교단에서 애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남편의 실직으로 어쩌다 이곳까지 왔다. 이것저것을 했지만 거듭 실패만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식당을 운영하겠다고 뛰어 들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된장찌개 맛이 좋아 손님이 많다고 한다. 개업하는 날 영숙은 전화로 큼직한 화분하나를 주문해주었다. 해정이와 한번 가 본다고 하면서 서로의 시간이 잘 맞지 못해 가보지 못했다. 해정은 지금 월넛크릭에서 어린이들한테 첼로 강사를 하므로 시간이 자유롭지 못하다.
영숙의 남편은 청소업을 하고 있다. 그래도 세 명중 시간의 여유가 제일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엔 고생도 많이 했다. 남들이 자고있는 시간에 큰 빌딩 안에 들어가 청소를 하면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런 일 끝에 생활의 여유가 생기다보니 한때 가져 던 일을 해보고 싶었다. 새해 첫날 신문에 자기 이름과 사진이 나오고 당선소감의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영숙의 꿈이었고 바람이었다. 이렇게 세 사람은 아니 한 사람이 더 있다. 정미. 그렇게 넷 여자는 광복동, 남포동 거리를 한때 누비고 다녔다. 너무 붙어 다녀 주위선 레즈비언이라고 입을 삐쭉거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넷 사람 중 한 명이 예술의 고장. 그림이 있는 프랑스로 가버렸다. 그렇게 떠나버린 정미는 20여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살아있으면 소식이 있을 것인데,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럼 집에서 죽었다고 하지 왜 모른다고 하게니.
그림이 아니라 사랑에 푹 빠져 있을지 몰라.
해정이 미국 들어오면서 두 사람도 고국을 떠나 올 기회가 생겨 베이 지역에서 다시 가깝게 살고 있다. 영숙은 해정이와 함께 ‘순 된장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영업시간이 일러 그런지 홀 안은 조용했다. 식당 안은 옛날 한국 풍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이 깍쟁이들, 이제야 오네. 은희는 영숙과 해정의 손을 잡는다.
너희들 그동안 더 고와졌다. 나는 이렇게 부엌대기가 다 되었는데. 늦게 와서 미안하다. 자, 그런 인사는 생략하고 저 쪽으로 앉자.
은희는 두 친구와 테이블에 앉는다. 은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말문을 열어 제켰다. 그동안 입안에 저장해 둔 말이 둑이 터져 흘러내리는 물처럼 줄줄 쏟아져 나온다. 두 친구는 언제나처럼 은희의 입놀림만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
야, 야, 너희들 정미 알지. 어제 나 봤다.
두 사람은 정미란 말에 눈이 둥그래져 자라목처럼 쭉 내어 밀면서 무엇! 하면서 은희를 빤히 쳐다본다.
여기 왔었어? 영숙이 다급히 묻는다.
그럼 여기서 봤지. 얘는. 이제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그래 이 지역에 살고 있데? 전화 번호는 적어 놓았지? 그런데 난 그런 거 하나도 모른다.
여기서 만났다고 했잖아. 이 얘봐. 영숙은 어이없다는 뜻이 해정이를 바라본다.
그래 여기서 만났지. 그런데 꿈에서 봤어. 어머! 기집애.
두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의자 뒤로 몸을 눕히면서 숨을 푹 내어 쉰다.
음식은 다 준비했으니 잠깐 들어가 보고. 은희가 일어날 때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 말을 다 끝맺지 못한다. 문 앞엔 남아프리카에서 막 도착한 것 같은 거창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은희는 어깨를 한번 들썩거리고 두 친구를 바라본다.
아침부터 흑인이 들어와 재수 옴 붙었네. 은희는 냉수 컵을 들고 흑인이 앉은자리로 간다. 여기 순 두부 두 개 줘요. 또 한사람 와요. 네!
은희는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흑인을 멍하니 쳐다본다. 조금전 자기가 한 말에 무안하기도 했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은희는 무어 라고 사과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가슴이 쿵쿵거려 말을 못하고 그만 돌아섰다. 그때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양여자. 화장기 없는 얼굴. 그러나 세련된 모습이었다. 은희는 급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흑인과 마주 앉아 무어 라고 말을 한다. 이쪽에 앉아있던 영숙은 조금 전 들어온 여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얘. 방금 들어온 저 여자 어디서 본 사람 같아. 글세 동양 여잔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 영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한테로 간다. 저, 실례합니다.
두 남녀는 영숙을 빤히 올려다본다.
저, 혹시 부산 K 여고 나오지 않았어요? 네. 그런데....... 여자는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한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 영숙이지? 나 정미. 양 정미야.
두 여인은 서로 왈칵 끌어안았다. 그때 주방에서 나오던 은희는 걸음을 멈추었고, 해정은 일어나 이 쪽으로 온다. 순간 식당 안은 서로 이름을 부르고 웃음으로 왁자지껄해 졌다.
인사해. 남편 윌리엄 모오건 씨야. 정미는 앞에 앉아 있는 흑인 남자를 남편이라고 친구들한테 소개한다. 영숙이가 먼저 악수를 청하면서 만나 반갑다고 한다. 은희는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조금 전까지 카랑카랑한 음성은 어디로 들어갔는지 파리가 죽어 가는 소리를 내고 있다.
조금 전 죄송했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나의 와이프 말고 한국사람들 흑인들 싫어하지 않습니까? 여기는 미합중국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은희는 옆에 서 있는 정미의 손을 잡는다.
정말 미안하다. 정미야. 그래, 서로 말조심하면서 살아가자.
식당 안으로 칠 팔 명의 여자손님들이 들어온다. 식당은 또 왁자지껄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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