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구목사(뉴욕산정현교회)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하고 여수에 있는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과 애양원교회 및 손양원목사와 두 아들, 삼부자가 묻힌 세 무덤이 있는 곳을 찾아보고 귀국했다.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족의 부흥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바리세인 서기관의 신앙과 물질주의 교회, 물량주의 교회, 재물 중심의 사역이 팽배하게 퍼져서 어촌, 농촌, 빈촌에서 사역하는 목사는 실패한
목사, 모자라는 목사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도시에서 사람을 많이 모으고, 큰 교회를 짓고, 기도원을 짓고, 무덤까지 산 교회의 목사는 성공한 목사, 존경받는 목사, 부흥회에 불려 다니는 목사로 판명되고 공인되고 있는 병든 한국인교회에서 정금일침을 주고 산교육을 주고 있는 분이 손양원목사라고 생각되어진
다.
손양원목사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손양원목사의 순교기념관에 기록된 일대기 중에 몇 개만 요약해 본다.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1925년 경남 성경학교 졸업, 밀양, 방어진, 울산, 부산 등에 교회 개척.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1938년 경남노회 부산지방 각 교회를 다니며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 이 때문에 시찰회에서 전도사직 박탈. 1938년 여수 애양원교회(나환자교회) 전도사 부임.
1940년 9월 신사참배거부로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어 광주형무소, 청주교도소, 경성구치소 등에 투옥되고 종신형 선고 받음. 1945년 8월15일 해방으로 석방.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1948년 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 두 아들(동인, 동신)총살 순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음. 1950년 9월13일 6.25동란 시 공산군에게 잡힘. 1950년 9월28일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공산군이 총살 순교.
손양원목사는 48세의 짧은 생애 동안에, 그 시대 최대의 문제인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종신형까지 받았다. 또 남이 꺼리는 나병환자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 아들로 삼으며 사랑의 원자폭탄을 터뜨린 분이다. 최후에는 공산당에게 예수
를 전하다가 장열하게 총살당하며 목숨을 주님께 바친 순교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큰 충격을 주슨 산 목사였다. 우리도 이 분처럼 순교의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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