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만행 규명 뜻 못이루고…
한인사회와 주류사회에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을 고발하는데 앞장섰던 강제징용 피해자 정재원(사진)옹이 21일 아침 6시 83세를 일기로 할리웃 장로병원에서 타계했다.
정옹은 해방되기 1년 전 일본의 시멘트 제조업체 구 오노다(현 다이헤이오)사로 강제 징용돼 혹독한 고난을 겪었으며,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1997년 7월 2차대전중 전범국가로 인한 피해보상을 10년내 할 수 있도록 규정한 특별법(일명 헤이든법)을 발효시키자 그해 10월 LA에서 오노다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다. 당시 정옹의 소송은 특별법 발효 이후 첫 케이스로, 일제 피해자 및 인권단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그러나 이 소송은 본재판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재판의 근거인 특별법의 연방법 합헌 여부를 놓고 일본측과 지루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2003년 초 LA 수피리어 법원이 합헌 결정을 내려 큰 기대를 모았으나 주항소법원이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헌 결정을 내렸고, 연방 대법원에 항소했으나 각하 결정으로 아쉬운 끝을 맺었다.
맏사위 정병위씨는 “아버님은 수차례 의식을 잃는 두 달간의 투병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강제징용 악몽이 떠오른 듯 가족들에게 ‘일본 사람들은 못 믿어’라는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셨다”고 전했다.
정옹 타계 소식을 접한 주변 인사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송 진행에 참여했던 바른 역사를 위한 정의연대 정연진 공동의장은 “일제 피해자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진실규명에 앞장섰던 분이 돌아가셔서 가슴 아프다”며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사실을 법원기록에 남긴 것은 한민족이 펼치고 있는 진실규명 운동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신문로에서 출생한 정옹은 중앙고 31회 졸업생으로 도쿄 호세이 대학에서 영어 경제학부를 졸업한 직후 곧바로 강제 징용돼 함경도 지역에서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후 잠시 미군 통역관으로 근무하다 교직으로 옮겨 인천여상, 경동고, 경기고, 관악고, 용산고 등 서울 주요 고교에서 평생 평교사로 영어를 가르치다 1987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1996년 사별한 부인 이영재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장례 일정은 입관예배가 23일 오후 6시, 영결예배는 24일 오전 9시 각 LA 한국장의사에서 엄수되며 장지는 할리웃 포레스트론이다. (310)892-7135
<황성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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