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스 만 침공작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1,189명이 쿠바군의 포로가 됐고 4명의 미국인 조종사를 비롯,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후르시초프 소련 대통령과 카스트로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침공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발표한 후 알렌 덜레스 CIA 국장을 경질하는 것으로 분을 삭였다.
피그스 만 침공작전 실패 이후 카스트로와 후르시초프 소련 서기장의 유대가 깊어짐에 따라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케네디 대통령의 결의 역시 굳어져갔다.
1961년 12월2일, 카스트로가 쿠바에 공산주의 체제를 도입할 것이라고 선언하자 케네디 행정부는 1962년 2월7일을 기해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 조치를 취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다.
■ 쿠바 미사일 위기
카스트로와 케네디가 맞선 2라운드 대결은 ‘미사일 위기’였다. 1962년, 소련은 쿠바에 최소 40기 이상의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하려 들었다. 미국이 이같은 사실을 처음 안 것은 그해 10월15일 스파이 U2기가 하루전에 찍은 사진 분석을 통해서였다.
10월16일 첫 보고를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10월22일 후르시초프에게 항의서한을 보낸데 이어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및 쿠바로 향하는 외국 선박들에 대한 강제검색을 명령했다. 이에 맞서 쿠바는 전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후르시초프와 하루 한번꼴로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소련 서기장은 미사일 기지 건설종료를 기다리며 ‘시간 벌기’ 작전으로 일관했다.
10월27일, 케네디 대통령은 “10월29일 오전을 기해 쿠바와 소련 핵 미사일기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미 해군은 25만명의 지상군 병력과 1,000대의 전투기, 250척의 함정을 동원해 쿠바를 포위했다. 쿠바를 가운데 둔 미-소 ‘핵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같은 날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소련 대사관으로 보내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다.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면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을 6개월 이내에 극비리에 제거하겠다는 메시지를 아나톨리 도브린 소련 대사를 통해 후르시초프에게 전달한 것.
쿠바 공격을 몇 시간 앞둔 28일 후르시초프는 케네디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핵전 불사’라는 케네디의 단호한 태도에 굴복한 셈이다. 카스트로는 강력히 반발했으나 후르시초프를 비난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사태를 보고 받은 10월16일부터 후르시초프가 케네디의 극비 타협안을 받아들인 10월28일까지 13일간 계속된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소련을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아갔을 뿐 아니라 쿠바와 미국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를 구축해 놓았다.
그로부터 이미 40여년이 흘렀지만 ‘은퇴하지 않는 혁명가’ 카스트로에 대한 미국의 적개심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도 강화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끝>
<이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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