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른아이 할 것이 피자를 즐겨 먹으면서도 정작 젊은이들은 우리의 전통음식인 빈대떡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어린이 비만이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는 가운데, 녹두를 주재료로 하고 있는 빈대떡은 아주 좋은 건강식으로 여러 면에서 피자를 능가 할 음식이다. 중국에서는 알병 일본에서는 오꼬노미야끼로 불려지고 있는 빈대떡, 이 빈대떡은 어찌 보면 우리 전통음식 중에 세계화시키기에 아주 좋은 음식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외래음식을 선호하고 잘 알면서도 우리 음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빈대떡의 유래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우리말의 뿌리를 적은 역어유해에 등장하는 중국 떡의 일종인 빈자떡 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명물기략 에는 중국의 콩가루떡인 알병의 알자가, 빈대를 뜻하는 갈(蝎)로 와전돼 빈대떡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오래 전
서울 덕수궁 뒤쪽에 (현재 정동 지역) 빈대가 많아 빈대골로 불렸는데, 이곳 사람 중에 부침개 장사가 많아 이름이 빈대떡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민속학자 방종현은 빈대떡을 빈자(貧者)떡, 즉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이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18세기 서명응이 지은 방언집석(方言輯釋)에서는 녹두를 주재료로 하는 빙저라는 지짐이가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빙쟈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이 말이 세월이 흘러 빙자떡→빈자떡→빈대떡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빈대떡에 대해 1948년 최 남선(崔南善)이쓴 [朝鮮常識(조선상식)]風俗篇(풍속편)에 보면 떡인지 적(炙)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일종에 [빈대떡]이라는 것이 있으니 번철(燔鐵)에 기름 발라 부쳐 먹는 전병(煎餠) 비스름한 것이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1670년경 안동장씨(安東張氏)에 의해 쓰여진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녹두를 뉘 없이 거피(去皮)하여 되직하게 갈아서 번철에 기름을 부어 끓으면 조금씩 떠 놓으며 거피한 팥을 꿀로 발라서 소를 넣고 또 그 위에 녹두 간것을 덮어 빛이 유자 빛 같이 되게 지져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빈대떡이 이 책에서 빈쟈라는 이름으로 문헌상(文獻上) 처음 등장하고, 1815년경 빙허각(憑虛閣李氏)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보면 빙쟈만드는 법을 녹두를 되게 갈아라. 즉시 번철에 기름이 몸에 잠길만큼 붓고 녹두즙을 숟가락으로 떠 놓고 그 위에 밤소 꿀 버무린 것을 놓고 녹두즙을 위에 덮고 수저로 염접하여 눌러가며 소를 꽃전 모양으로 만들고 위에 잣을 꽂고 대추를 사면에 꽂아 지진다.라고 기록 되었는데, 위에 기록된 빈대떡은 모두 화전(花煎) 같은 것으로 이 책에서는 빙쟈라고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빈쟈-빙쟈로 불려 진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빈대떡이 소를 넣지 않고 지져내면서 빙쟈가 원래의 이름인 빈자로 환원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조선시대 말엽 흉년이 되면 유랑민들이 남대문 밖으로 몰려 들게 되는데, 당싱의 세도가(勢道家)에서는 이들을 위해 빈자떡을 만들어 소달구지에 싣고 와서 어느 집의 적선(積善)이오!하면서 그들에게 나눠 줬다고 한다.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주]에도 양산의 통도사(通道寺) 주지(住持)로 계시던 김 구하(金 九河)스님이 동승시절 걸승(乞僧) 수도를 위해 방랑을 하던 도중 한양에 갔는데, 조정의 배불정책(排佛政策)에 의해 성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대문에서 배회하게 되었다. 그해 흉년이 들어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이농(離農)을 한 수백세대의 유랑민들이 남대문 밖에 노숙(露宿)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남대문 안에서 소달구지에 빈대떡을 싣고 와 손종(手鍾)을 딸랑!딸랑!흔들며 북촌 여흥민씨 적선이오! 광통방(廣通坊) 중인(中人) 천령현씨(川寧玄氏)의 적선이오!하면서 빈대떡을 던져 주었다고 한다.
이 빈자떡이 지금과 같은 빈대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정동(貞洞)의 옛 이름이 [빈대골]이라 불렀는데, 이 빈대골에 빈자떡 장수가 많아서 그 이름이 빈대떡이 된 것이라고 하나 이러한 설(說)과 관계없이 빈자떡의 어원(語源)은 우리말 뿌리를 적은 옛 문헌인 [역어유해(譯語類解)]에 의하면 빈자떡이 중국말인 병자(餠字)에서 비롯 되었다라고 했고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중국의 콩가루 떡인 알병의 알자가 빈대를 뜻하는 ‘갈(蝎)’자로 와전되어 빈대떡이 됐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빈대떡을 [오꼬노미야끼]라고 부르는 일본 나라(奈良)시대 문헌에도 갈(蝎)자의 도해(圖解)가 마치 빈대와 같이 그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는 녹두 부침음식이 없고, 일본 역시 녹두라는 식물조차 생산되지 않았다. [제민요해(齊民要解)]에 나오는 중국의 ‘절병(截餠)’을 빈대떡의 원조로 추측하는 사람이 있으나 빈대떢은 주재료가 녹두가루요. 절병은 밀가루다. 단순히 부침개의 이름이 빈대와 같다하여 빈대떡의 원조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 못이다.
우리의 음식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대주의적 사고(思考)를 가진 조선시대를 전후해 쓰여진 요리서(料理書)들이 문화적, 환경적, 지리적인 사회성을 가지고 태생된 우리 고유(固有)한 음식을 재료, 조리법등이 엄연히 다름에도 억지로 중국의 유사한 음식을 찾아 연관(聯關)지으려는 무리가 엿 보이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이 빈대떡을 보통 부친다해서 ‘부치개’, ‘부침개’라고도 하는데, 그 이름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
르게 부르고 있다.
서울은 빈자떡, 또는 빈대떡이라 부르고, 크기가 어른 손 한 뼘만큼 크다. 녹두 간 것을 얇게 소댕에 부치고 그 위에 쇠고기, 숙주나물,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김치등을 얻는다. 다시 그 위에 얇게 녹두 간 것을 덮어 펴 주므로 빈대떡이 든든하게 두꺼워져 뒤집어 부치기가 쉽다. 이때 기름은 곡 참기름을 사용했다. 서울 빈대덕의 2~3배가 되는 평안도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서 거기에 채소와 돼지비개를 넣어 만드는데, ‘녹두지짐이, ‘지짐개’라 부르고, 황해도 지방에서는 ‘막부치’라고 부른다.
빈대떡의 어원이야 어찌 되었든 어원(語原)과 관계없이 본디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기름에 지진 어육(魚肉)등을 고배(高排)로 괼 때 어육의 즙(汁)이 흡수 되도록 받쳐 주던 고임 떡이었으나 이 어육 즙이 베여 있는 독특한 맛이 훗날 하나의 독립된 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빈대떡이 빈자들의 구휼(救恤)음식이 되고, 이 빈대떡은 1964년대 전후 선술집의 술안주로 각광을 받아 빈대떡 신사라는 대중가요를 탄생시켰고 빈대떡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고급 음식점인 한정식의 단골메뉴로 등장한 이후 서민들
의 친근한 음식이었던 빈대떡도 서민들이 쉽게 대 할 수 없는 귀한 음식이 되었다.
빈대떡의 기본 재료로 녹두, 옥수수, 밀, 수수, 메밀, 감자, 완두콩 등이 쓰이며 부재료로는 배추김치, 돼지고기, 파, 마늘, 고춧가루, 등이 있다.
녹두지짐은 지짐 중에 맛이 독특해서 제일로 꼽힌다.녹두에 부족한 메티오닌과 트립토판을 돼지고기가 보충해 주므로 영양이 보완되고 입맛이 없을
때 입맛을 돋우어 주는 훌륭한 먹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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