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당에서 분당까지
`백년정당’을 기치로 내걸고 돛을 올렸던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지 고작 3년3개월여 만에 사실상 분당 사태라는 암초에 걸려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2007년 대선의 해가 밝았지만 당이 지리멸렬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거센 정계개편의 격랑에 휘말리면서 출항 초반에 침몰한 `타이타닉’호와 같은 처지가 된 것.
우리당은 2003년 11월11일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 40명과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5명, 개혁국민정당 의원 2명 등 47명이 중심이 돼 `왜소’하게 출범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으로 3김시대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영호남 지역기반을 양분하고 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틈바구니에서 지역구도 타파와 전국 정당 건설, 금권정치 타파 등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걸고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 구축에 나섰다.
첫 항해에서는 대통령 탄핵 등 소수여당의 비애를 겪는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국회 과반 획득이라는 만선의 기쁨을 맛봤다.
그러나 이후 `개혁 대 실용’이라는 모호한 정체성 논쟁으로 서로를 깎아내렸고, 여기에 당과 원내 지도부를 분리한 `투톱 시스템’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내부적 혼란이 가중된 상태에서 맞은 2004년 첫 정기국회는 우리당 추락의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민생과는 동떨어진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입법을 전면에 내걸었다가 한나라당의 육탄저지에 막혀 사실상 좌절되면서 우리당의 개혁동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당청 갈등도 여권의 동반추락을 가속화시킨 요인이었다.
그 사이 현 김근태 의장까지 2년10개월 동안 9차례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정상 지도부보다는 `비상체제’가 상시화되는 기형적 모습을 보였다.
17대 총선 직후 한때 50% 가까이 치솟았던 지지율은 2년여만에 10% 전후로 급전직하했고, 2005년 이후 치러진 각종 재·보선에서는 `40대 0’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면서 정치권의 `천덕꾸러기’신세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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