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선교회 대표를 지내며 북한선교에 열정을 바쳤던 정성철 목사가 지난 4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간암이 악화돼 의식을 잃기 전까지 후원자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하면서 “사랑선교회를 대신 맡아 북한 동족 복음화에 힘써줄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정 목사. 지인들은 “그는 갖은 오해와 비난을 무릅쓰고 사심 없이 북한 어린이 돕기와 선교에 삶을 바친 사람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1982년 도미한 후 2001년 PCA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전 한 때 워싱턴 DC에서 큰 사업을 하기도 했던 정 목사는 사랑선교회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 차영준 목사 등과 함께 오래 중국 선교에 몸담고 있었다. 이후 선교 방향을 북한 어린이 지원 사업으로 전환한 정 목사는 평양에 빵공장을 건립하기로 하고 다각도로 방법을 찾아 나섰다. 오랜 물밑 작업 끝에 문은 2005년 6월말 경 열렸다. 중국 심양에서 비자가 나오지 않아 거의 포기 상태에서 귀국을 준비하던 사랑선교회 일행은 극적으로 입국을 허락받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방문팀은 정목사와 단동에 있는 평화교회(이재룡 목사)의 한영국 집사, 그리고 본보 기자로 구성됐다.
3박4일의 일정 동안 일행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및 금성제일중학교 관계자들을 만나 빵공장 설립을 의논했고 한 달에 2,500명 정도의 분량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빵 생산 시스템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잠정 합의 했다. 약 두 달 뒤 정 목사는 다시 중국으로 날아가 기계와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해 북한으로 반입했고 얼마 후 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변변한 후원자나 교계의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최근까지 북한을 다수 방문하며 지원 사업을 벌여온 정 목사의 수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양 빵공장 설립에 앞서 한국전이 발생한 6.25에 맞춰 남북 화해를 위해 시도한 ‘사랑의 꽃나누기’ 행사는 “빨갱이 아니냐”는 오해와 손가락질로 되돌아 왔고 한인사회의 반응은 차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 목사는 북한 어린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이런 노력의 결실로 “미주 한인은 언제든 사랑선교회의 이름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는 북한 당국의 언질을 들을 정도로 신뢰도 쌓았다.
그러나 마지막 북한 방문 몇 달 전 다리를 심하게 다친 정 목사는 치료를 위해 먹은 약이 간에 큰 손상을 주면서 극도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거의 사경을 헤맬 정도였다.
처음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가 끝내 간암으로 악화돼 자리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6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담담히 전하면서 “하나님이 때가 됐다고 불러 가시니 두려울 게 없다”며 평안한 모습을 보였다.
정영신 사모는 “고인이 사랑선교회를 후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혹 아픔을 준 분들에게는 용서를 빈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7일 저녁 7시에 열리는 고별예배 장소는 그가 담임하던 희망교회에서 애난데일에 소재한 메시야장로교회로 변경됐다. 문의 (571)331-8614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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