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군수 참모부장(5)
군수관계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기간 나는 산하의 군수 시설 가운데 민간 기업이 운영 가능한 부분이 많음을 보았다. 육군 피복창이 그 대표적 시설이었다. 차량창도 조병창도 꼭 육군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유일한 이유라면 많은 장비와 정비 기술들이 당시는 군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서는 처음 보는 장비이며 이에 대한 부속품이나 수리 기술도 민간에서는 보기 드문 기술에 속했다. 따라서 처음에는 군원을 통해 장비와 부속품이 들어 오고 초보적 정비는 군내에서 교육되어야 하며 정도 높은 수리와 정비는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에 있던 미국 기지창에서 정비가 이루어 지던지, 일본인의 기업이 일부 하청하는 제도를 취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기술의 초보가 군에서 민간으로 새어 나가는 경로를 밟았기에 군에서 정비를 전담하는 체제가 불가피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군수 국장으로 취임한 때는 많은 기술이 민간에게 흘러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민간이 공장을 움직인다면 그의 원가는 얼마나 될 것이며 군이 직영한다면 비교 원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신경을 썼으나 시원하게 알려줄 사람이 없어 답답하였다. 긴 눈에서는 민간 기업이 군을 대신함이 옳다고 생각을 하였다. 나는 피복창 같은 것은 군이 직영 할 필요가 없으리라 믿고 원가를 비교토록 요구했으나 끝끝내 성공을 보지 못했다. 나는 통계나 회계학의 지식이 있으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제를 나에게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제일 먼저 경제 원론과 통계학과 회계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군수 국장으로 답답증을 풀지 못한데 대한 착상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를 군수 국장으로 기용하며 국회의원 면회 사절의 싸인을 부치게한 이 총장은 그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단명 참모총장이 되어 합참 의장이 되었고 후임으로 백선엽 대장이 제일 야전군 사령관에서 참모총장으로 이동하였다. 백선엽 대장은 두번째로 참모총장이 되는 셈이고 나는 그와 잠시였으나 2군단과 제일 야전군 참모장을 거처 세번째로 그를 상관으로 모시게 됐다. 백 참모총장은 나에게 육군의 새로운 정책 요강을 기안할 것을 요청했다. 나는 느끼고 있던 20개 가량의 육군의 정책 방향에 대한 초안을 그와 함께 토의했으며 야전군 사령부에서 모인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회의에서 새로운 육군의 정책 방향으로 백 참모총장을 대신해 설명하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1957년으로 기억된다. 나는 대만의 쌍십절(10월 10일이 국민당 정권의 탄생일로 안다) 기념식 참관을 명목삼아 펑 멍치 대만군 총사령관(한국과 달리 육해공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사령관)의 초대로 백선엽 대장을 장으로 구성하는 약 10명 가량의 육군 수뇌급 대만 방문단의 일원으로 대만을 방문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기한은 약 1주간의 긴 여행으로 육안으로 중공의 대안이 보이는 진멘 마주 섬의 최일선을 비행기 엔진을 끄고 진입함을 위시해 수도 대북과 대중 대남으로 전 대만 군의 요충지를 시찰하며 대만군의 중요 간부는 물론이고 장개석 총통을 비롯 진성 부통령을 방문할 수 있는 특혜가 부여되었다. 대만 왕래 중 일본 오키나와 섬을 들린 것도 참고가 되었다. 대만 여행은 나에게는 오래 동안 기억에 남는 시찰 여행이 되었다.
<계속>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