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응모씨
최용완씨
1961년 숭례문 보수공사 참여 최용완·연응모씨
“마치 내 집이 타는 것 같았습니다. 내 젊음을 바친 작품이었고, 내 인생의 큰 자랑이었는데…”
600년의 전통을 간직한 ‘국보 1호’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인해 잿더미만 남게 된 모습은 숭례문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남가주 한인들에게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건축가 최용완(69)씨는 “숭례문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메어지는 것은 말로…, 말로 못해요…”라며 끝내 눈물을 떨궜다.
가든그로브의 연응모(67·동양유리 대표)씨도 “대한민국이 천만금을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국보 1호도 지키지 못하는데…, 자존심이 너무도 상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최씨와 연씨는 모두 지난 1961년 실시된 숭례문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건축·설계 전문가였다.
당시 서울 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최용완씨는 도면 책임자로 취직, 숭례문의 설계도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도면제작은 63년까지 계속됐으며 이후 최씨는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 66년 미국으로 이민왔다.
최씨는 “설계도를 만들기 위해 건물을 해체하고 도면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선조들이 도면도 없이 이렇게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었다”며 “그런데 아침 뉴스에서 그런 숭례문이 불타는 장면이 나와 3시간 정도 붙어 앉아 지켜보며 결국 울고 말았다”고 탄식했다.
연응모씨는 61년 보수공사 당시 최씨 밑에서 실측을 담당했던 설계기사였다. 직접 지붕에 올라가 실측을 하던 과정에서 낙상해 크게 다친 적도 있으며, 부서진 기와 조각을 외국인들이 “하나만 얻을 수 없냐”고 부탁하던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연씨는 “다행히 도면이 있어서 복원이 가능하겠지만 시커멓게 타버린 우리의 마음은 누가 복원해 주냐”면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최씨는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세계적인 문화재들이 있지만 그동안은 먹고 사는데 바빠서 우리 선조가 무엇을 남겼고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민족의 수치가 아닌가”라며 “이제라도 이것들을 더욱 잘 보존하고 세계에 알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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