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으로 오셨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기독교의 구원론적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의 본체 안에 존재하던 그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케노시스’ 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만 신의 ‘케노시스’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케노시스’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신과 동무할 수 있습니다.
신이 낮아져서 사람이 되었다는말은 어떤 공간적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 양식과 관계됩니다. 신이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절대적 존재세계로부터 이 역사의 한계 안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절대로부터 상대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 동무가 된 사건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인카네이션)이라고 합니다.신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 말은 기독교의 신론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서 핵심입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초대 교회의 3백년 역사를 통해서 줄기차게 진행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완전한 신성(神性)을 잃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한 사상을 가리켜 영지주의라고 했는데, 이들은 이단으로 내몰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본질을 그 인성(人性)에 초점을 두고 강조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에비온주의자라고 하는데, 초대 교회는 이들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니케아 종교회의(AD 325년)에서 예수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참된 인성(vere Homo)과 참된 신성(vere Deus)으로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역사적인 인간 예수에게서 인식합니다.
신은 사람입니다.
신과 사람이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 사람의 동무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동무가 되어 신의 사랑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신의 숨을 쉬게 해 주었습니다.
신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사람의 동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동무는 상호관계적입니다. 신을 동무로 받아들이고 함께 어깨동무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신은 동무가 됩니다. 진정한 사람사는 세상은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한 세상입니다. 그곳에 이미 신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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