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남은 분량을 줄여가던 달력이 기어이 달랑 한 장만을 남겨놓고 만다.
365번 같은 시간에 해가 뜨고 지는 기적이 반복되며 뛰듯이 살아온 많은 날들이 지나고 보면 한 일주일쯤으로 느껴지는 참으로 무심한 세월이다. 세월의 속도를 느끼면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라던데… 이제 정말 나이를 먹어 가기는 하는가 보다.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는 기억 중에 빨리 세월이 흘러 머리 한번 길러보고, 미성년자 관람불가 안내판이 붙은 극장을 폼 나게 출입하고, 음악 감상실에 앉아 애니멀스(animals)가 절규하듯 부르던 당시의 명곡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House of the Rising Sun)을 들으며 턱이 빠질 듯 입 벌리며 따라할 때 코에서 입에서 증기기관차 굴뚝처럼 담배연기가 동시에 뿜어져 나오던 동네 형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두툼한 입술에 사과 한 개쯤은 쉽게 들락거릴 사이즈의 입을 가져 메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배는 잘 모아지지도 않는 그 큰 입을 모아 마치 금붕어의 입 모양을 흉내 낼 때마다 피어오르던 도넛 모양의 담배연기 묘기가 너무 멋있어 감동(?)을 받고, 나는 언제나 저렇게 해보나 싶어 세월에 대고 빨리 가달라고 부채질하던 시절, 그 때 부채질도 모자라 선풍기라도 돌려 시간을 보내려 안간힘을 썼던 그 눈물겨운 노력으로 분명히 조금쯤은 시간이 빨리 흘러갔을 것 같다. 그냥 놓아두어도 이리 흘러가는 세월인데 그때 세월을 향해 부채질이나 하지 말았을 것을…
예전엔 그렇게도 더디던 세월이 점점 왜 이리 빨라지는지 이젠 정신 차릴 틈조차 안 준다. 그때는 보내려 했지만 이제는 잡아야 한다. 이제 약간 철이 드는가 보다. 정녕 타임머신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분명 나 혼자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비슷한 폼으로 생각에 잠겨 보다가 사진장이 다운 결론을 내리고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을 향해 제안한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면 정지라도 시키자.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능력은 아마 하느님 외에는 카메라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닌가? 지금 셔터를 눌러 담아놓은 이미지는 영원히 정지된 시간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차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정지시켜 놓자. 꼭 작품사진이 아니면 어떠랴 사진이란 기록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사진이란 시간을 찍는 일이다.
잘 찍고 못 찍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조금은 삐뚤어진 구도와 부족한 노출이지만 훗날 어떤 작품사진보다 그 이상의 값어치와 의미로 남겨질 수 있을 것이다.
남은 달력 한 장마저 떼어내기 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올해를 마감하는 기록사진 한 장쯤 남겨보자. 기왕 찍는 사진이라면 모두 같은 표정에 전봇대 비슷한 포즈에서 벗어나 얼굴 판박이 사진이 아닌 표정이 담기고 작은 이야깃거리가 담긴 사진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 경치 좋은 명소가 아니어도 신발이 흐트러져 있는 현관 앞에서, 옷가지가 어질러진 거실 소파이면 어떠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오늘 이 행복한 시간들을 정지시킬 수만 있다면…
이제 한 해가 가기는 가는가보다 몇 번을 벼르다가 자체 달력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디자인을 구상하며 달력에 넣을 사진들을 이 달 저 달로 옮기고 배치해 보면서 새로운 한 해를 미리 실감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보다 가는 것의 아쉬움이 더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의 사는 이치가 그런 것을… 만들어질 달력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이 달력이 뜻 깊고 행복한 날들로 채워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넘어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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