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2010
한인이민 역사 굽이굽이 큰 획, 50주년기념사업 당시, 인공기 게양 막고 한인사회 화합 주도
“하나님이 얼마나 더 허락하실는지 모르겠으나 ‘저기 보이는 천당 집’이 그리워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천당에서 더 많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 또 한 해를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께 많은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언제나 나이를 잊은듯한 해 맑은 웃음과 함께 유머를 잊지 않았던 이동진 원로목사가 9일 오후 6시30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년덕담에서 밝힌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는 천당 집’으로 먼 길을 떠났다. 향년 94세.
한국 현대사와 하와이 한인 이민사와 함께하는 고인의 삶의 발자취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하와이를 넘나들며 크고 작은 역사를 만들었다.
1915년 평남 강서군에서 한국기독교 초창기 목사였던 이용린 목사님과 어머니 정수인 가정에서 4남2녀중 3남으로 출생한 이 목사는 평양 숭실대에서 수학하다 중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반일분자로 체포되어 강제 귀국해 일본으로 유학, 동경 일본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 팔손스 대학을 졸업하고 루이빌 장로신학대를 졸업한 후 1944년부터 51년까지 8년간 사우스 타코다, 오레곤, 위싱턴주의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 보호지역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동진 원로목사와 하와이의 인연은 1952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제일한인감리교회(현 그리스도 한인연합감리교회) 이중언어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 목사는 10년간 시무하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하와이 6개 소수민족(백인, 일본, 필리핀, 사모안 및 인도인)을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펼치며 소수민족 간의 화합은 물론 소수민족으로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화합과 자긍심을 높이는데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75주년, 90주년은 물론 이민100주년기념사업의 성공적 개최의 주역이기도 했던 이동진 목사는 특히 1953년 하와이 한인이민50주년기념 행사 당시 남북간 정치적 대립이 첨예하던 이민1세들이 주관한 기념행사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함께 게양하려는 다툼이 일었을 때 양측을 설득, 화해시켜 인공기 게양을 제지시키는 등 투철한 국가관으로 동포사회 화합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세대와 민족을 아우르는 폭넓고 속깊은 교류로 하와이 소수민족 화합에 앞장섰던 이 목사는 KA우먼스클럽과 한인미술협회, 국제밝은사회운동 하와이클럽 고문으로도 활동하며 한인사회 진정한 원로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2세 교육에도 앞장서 숭실중고 대학에, 루이빌 신학대학과 클레어몬트 신학대등 모교에 장학금을 기부했다. 또한 2004년부터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장학기금을 전달, 목회자 양성에 일조하고 있다.
이동진 목사는 이 같은 공로로 한국과 미국의 모교로부터 우수동문상과 2005년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 받았다.
이동진 목사는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서의 두 아들과 재혼한 부인의 아들과 입양한 딸 등 유족으로 3남1녀가 있다.
<신수경기자>
<사진설명: 2006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한 후, 올해 1월 이민 107주년 이민의 날 기념식장에서의 이동진 원로 목사 모습. <본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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