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뷰-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
▶ 드라마틱한 춤과 노래, 초가을밤 게티빌라의 숲속 정취와 어우러져, 2,500년전 패전의 아픔 시종 숨막힐 듯 몰아쳐
그리스 비극 ‘페르시아인들’에서 아톳사 여왕이 패전의 고통을 절규하고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Persians by Aeschylus)은 여러면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기원 전 472년에 쓰여진 이 작품은 인류 연극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고, 지금껏 전해오는 그리스 비극 33편 중에서 신화가 아닌,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살라미스 해전, BC 480)을 소재로 쓰여진 유일한 작품이며, 극중 유령이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이 신에 도전하는 오만(hybris)으로 인해 패망을 자초하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그런데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그리스 시인이 적국인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쓴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이스퀼로스는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해 승리의 기쁨을 맛본 아테네 시민으로서, 그 사실을 묘비에 남겼을 정도로 누구보다 애국적인 그리스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쓴 이 작품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페르시아인들의 충격, 절망, 고통의 모습만을 극화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인데 그리스 사람은 단 한사람도 안 나오고, 그리스의 승리를 찬양하거나 그리스 장수의 이름들조차 거론되지 않으며, 오직 패전해 수장된 페르시아의 장수들의 이름만 수십명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아픔만이 묘사된 특이한 작품이란 것이다.
이처럼 특이한 의미를 가진 연극이 지난 4일부터 말리부 해변의 게티 빌라 원형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매년 9월 한달 동안 그리스 비극을 한편씩 공연하는 게티 빌라에서 연극을 감상하기는 올해로 4번째인데, 갈수록 좋은 프로덕션으로 매혹적인 공연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에 있었던 ‘프로메테우스 바운드’(아이스퀼로스)도 굉장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올해 공연은 더 극적이고 통렬하여 1시간반 동안 숨도 못 쉬고 몰입하게 만들었다.
뉴욕의 시티 극단(SITI Company)은 코러스와 배우 몇 명의 대화로 이어지는 단순한 그리스 비극을 현대적으로 해석, 내용을 하나도 손상하지 않으면서 2,500년 후의 관객들에게 깊이 어필하는 공연으로 창작해냈다. 상당히 넓은 원형극장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동선을 드러매틱하고 장대하게 그려냈으며 춤과 노래, 원시적인 동작과 챈팅으로 그리스 비극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세트와 음향, 조명도 적절했고, 코러스를 이룬 8명의 배우들이 하나씩 빠져나와 다른 역들(아톳사 여왕, 메신저, 다리우스 왕의 유령, 크세르크세스)로 변신했다가 돌아가는 연출(앤 보가트 Anne Bogart 예술감독)이 인상적이었다.
가기 전에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천병희 번역)에 수록된 ‘페르시아인들’을 두 번이나 읽었다. 연극은 대사가 중요하고, 모든 대사는 영어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1세 한인이 즐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 비극은 운율이 있는 시와 같아서 대사가 쉽게 들리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이 작품도 시인 아론 푸치지안(Aaron Poochigian)이 새롭게 현대어로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이 빨라서 대사를 들으려 애쓰기보다는 전체적인 공연을 즐기는데 주력했다.
어떤 이유에서도 여름밤에 이보다 더 좋은 공연을 찾기 힘들다. 아름다운 게티 빌라의 건축물을 둘러보며 시원한 바닷바람, 청명한 숲속 공기, 맑고 조용한 밤하늘…
‘페르시아인들’은 9월27일까지 매주 목·금·토요일 오후 8시 공연된다.
티켓 36~45달러. www.getty.edu, (310)440-7300
Getty Villa 17985 Pacific Coast Hwy. Pacific Palisades, CA 90272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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