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는 한국의 것이 가장 예쁜 것 같다. 비슷한 칩몽크란 게 여기에 있는데 꼬리가 그래서야 한국 것만 못하다. 반면에 미국에 처음 와 미국산 다람쥐로 불렀던 청설모는 여기저기 지천이다. 기러기는, 늦가을 슬픈 가락과 어울려 하늘 높이 실루엣을 남기는 새 무리가 여기서는 아예 집 앞뜰을 점령하고 뜰 줄을 모른다.
그립고 그리운 건 쉬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선, 미국의 가을에서 오래전 한국적 정취를 찾는다는 게 어렵다. 기러기가 캐나디언 구스가 되어 어슬렁거리고 먼 숲속 높은 나무가지를 뛰날던 청설모는 문 만 나서면 전깃줄 위에서 곡예를 한다. 그렇게 같은 듯 다른 가을이다.
새 학기는 여기선 8월말, 9월초다. 한국은 3월. 여름 더위는 버틸 만 한데 겨울 추위는 어려워 땔감 아끼자고 겨울방학이 길고 여름방학이 짧았다. 조개탄 당번이 있었고 힘 센 순번대로 도시락이 난로 위에 쌓였다. 가장 힘 센 아이의 도시락은 2번, 아니면 3번이었다. 일그러진 권력은 어린 시절에도 항상 있었다.
9월의 영어 셉템버는 본래 7월이어야 했다. 줄리어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달에 이들의 이름을 밀어넣은 로마 달력 때문이다. 9월부터 12월 까지가 문자의 본 뜻을 잃었다. 8월의 하루 남은 달력을 보면서 9월이 가을인지, 새로운 건지 잠깐 생각했다. 올해는 한국의 추석이 빨라 9월15일이다. 9월의 좋은 날은 미국이 먼저 온다. 9월 첫번째 연휴, 레이버데이다.
노동절로 불리는 이날은 ‘늦어도 되는 날’과 겹친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해마다 9월5일은 ‘Be Late For Something Day’다. 역사가 짧지 않다. 1956년 필라델피아의 ‘관망하기 클럽’이 제정했다고 하는데 늘 바쁜 일상에서 조금은 쉬었다 가자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설립자 레스 와스는 장미 향기를 맡기 위해, 또는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 오랜 벗을 만나기 위해 잠시 하던 일을 늦춰도 큰 탈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60년 전에도 지금처럼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며 바빴던 모양이다. 하긴 그 때도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삼시세끼를 챙겨야 했으며 공장은 돌아갔다. 큰 전쟁을 두차례 겪은 미국이, 미국의 분위기가 바쁘지 않았을 리 없다. ‘늦어도 되는 날’은 바쁜 사회의 숨구멍이다. 비공식이긴 하지만 명칭 앞에 ‘내셔널’을 붙였다. 미국 전체가 그랬으면 좋겠다면서.
오래전 한국의 건널목에 이런 표어가 있었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재치있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섬뜩하다. 부드럽게 바꾼 것이 ‘조금 천천히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둘 다 서두르지 말라는 얘긴데 여유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하나 더. 충청도의 어느 읍내 파출소가 과속 운전 예방을 위해 붙인 현수막 내용이다. ‘그렇게 바쁘면 어제 오지 그랬슈.’ 이 현수막 내용을 응용한 초보운전 스티커는 압권이다. ‘면허따고 츰이유. 환장허것쥬? 전 죽것슈. 급하믄 추월하슈. 그리 급하믄 어제 출발하지 그랬슈.’
우사인 볼트가 아니고는 시간에 쫒겨서가 아니라 마음이 급해서 서두른다. 이 일을 마치면 다음 일을 해야한다는 압박감, 닥치지도 않은 일에 고민을 하고 바쁘게 살지 않으면 곧 뒤처질 것 같은 조바심에 여유가 없다. 골프장의 아름다운 풍광은 보는 이에 따라서 경치가 되고 헤저드가 된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맞는 선선한 가을의 냄새는 여유를 아는 사람 만의 것이다. 뒤뚱거리며 길을 건너는 캐나디언 구스와 귀를 쫑긋 세우는 토끼와 도토리를 물고 숨길 곳을 찾는 청설모를 미소로 볼 수 있다면 이곳의 9월도 그리워질 만 하다. 낙엽 치울 걱정을 미리 하지 마시라. 10월도, 11월도 그래야 천천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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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태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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