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전파를 위해 멕시코에 내 젊음을 바치겠다고 갔지만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5년만에 갑자기 뉴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와보니 현실은 나보고 돈을 벌라 했고, 많은 고심 끝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낯선 사람들, 낯선 땅에서의 새출발은 나무가 뿌리째 두 번 뽑힌 것처럼 힘들었다.
밥벌이도 해야 했고 적응해야 할 많은 상황들이 벅차기 만한 즈음에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는 전화가 왔다. 그러나 나는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다섯째 딸을 애타게 기다리신다고 또 전화가 왔다. 그러나 역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시다 더이상 못 기다리시고 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울고 또 울고, 흐느껴 울고, 통곡하고 6개월을 울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엄마는 가셨는데, 울어서 무슨 소용이 있나? 가신 분이 운다고 돌아오시나”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네’란 시구도 떠올랐고, ‘내가 불효자구나’란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떠난 후에야 엄마의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새삼 느꼈다.
우리 6남매가 자랄 때는 어지간히도 싸워 댔다. 그 꼴을 보고 엄마는 징글징글 하다고 하셨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짤그락 찌그락 했고, 엄마는 늘, “형제 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마이동풍 격이었다.
한참을 회한으로 괴로워하다 결심했다. ‘지금이라도 엄마의 뜻을 받들자’라고. 그후, 마침 언니와 동생이 딸들 교육 때문에 몹시 고심할 때, 두 조카를 데려왔다. 3년, 4년! 크고 작은 갈등과 고생이 있었고, 심지어는 돌려보내고 싶었을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이들을 품었다. 다행히 공부의 틀이 잡히고, 맘도 잡고, 모범생이 되어주었다. 졸업 후 둘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니게 됐다. 이런 덕으로 우리 자매들 간에 우애가 깊어지게 되었고, 엄마의 한을 풀어드린 셈이다. 살아 생전 못한 도리, 이렇게라도 기회를 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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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송(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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