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 방문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광화문 네거리의 교보문고였다. 이곳은 젊은 날 남편이 쓴 교재들이 몇 부나 전시되어 있나 찾아보기 위해 그를 따라 몇 번 가 본 기억이 난다. 늦은 나이에 오롯이 나를 위한 책을 사기 위해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전시장 안에는 문학 책 만해도 수없이 많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취사선택을 위해 잠시 읽어 볼 수 있도록 배려한 의자에 앉아 문학책 중에서 수필집 몇 권을 골랐다. 신간 서적 중에는 젊은 층을 겨냥한 단순명료한 책이 주로 눈에 띄었지만 단연 내 손에 잡힌 것은 시대를 떠나 수필의 고전이라 일컫는 피천득 교수의 ‘인연’이었다. 그 동안 미국생활하면서 글과는 거리가 멀어 외면했던 책들을 내 지갑을 열어 구입해 몇 권 더 가방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태평양을 건너 집으로 돌아와 글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취미생활로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용기도 따라야 한다.
돌이켜 보면 별다른 놀이 시설이 없던 초등학교 시절, 또래의 아이들에게 만화책이 단연 인기였다. 만화방에는 언제나 하교한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시리즈로 엮어 나온 만화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 역시 집과는 먼 거리도 마다 않고 줄달음으로 만화방으로 달려가 기다렸던 책들을 나오기 바쁘게 형제자매와 돌려가며 읽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요즘 청소년에게는 먼 이야기 같지만 문학전집이 유행하던 시절 방문판매원을 통해 구입한 세계문학전집은 집집마다 책장에 꽂혀있는 귀한 애장품이었다. 읽고 싶을 때마다 손에 닿는 대로 짬짬이 읽은 게 세계적인 문호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알게 모르게 조금씩 문학소녀의 감성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결혼을 하고 한동안 가계부를 적기 시작한 후 그날그날의 일들을 일기로도 적어 보았다. 중요한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습관처럼 썼던 메모도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지만….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일기를 써온 일은 내 일생을 두고 잘한 일 중 하나이다. 일기는 내 마음의 친구가 되어, 움츠린 속을 후련하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곱씹게 되는 아픔을 되새기기도 하며 서랍 속에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나의 마음속에서 묻어 나오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가 살다 보면 취미 생활이 감자 줄기 캐듯 내 속에 잠재해 있던 것들을 줄줄이 끌어 올린다.
내가 다니는 벧엘 시니어 아카데미에 마침내 문학창작반이 개설돼 강의를 즐겨 듣고 있다. 예견된 노년이 찾아오고 주체할 수 없는 많은 시간이 밀어 닥칠 즈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는 모처럼 나를 두렵고 떨리게 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 속에서 알게 된 삶이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어린 아이가 첫 걸음을 내딛듯이 조심스레 내 일상의 나날을 이야기로 적어본다. 비록 나 혼자 써 내려가는 하루하루가 남은 내 일생의 기록이긴 하지만.
오늘도 천천히 글감이 떠오르면 쓰다 지우기를 반복해 주위가 온통 지우개 자국으로 지저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아-가라 (Nia-gara)”를 흥얼거리며 오늘도 섬광처럼 생각이 떠오르면 곁에 둔 메모지에 글들을 옮겨본다. 늦게 찾아온 길동무가 내 삶을 풍요 속으로 초대하는 것만 같다.
<
윤영순 우드스톡,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