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하고 돌아오다 어린아이와 함께 넓은 주차장을 거닐며 노는 젊은 엄마를 만났다. 처음 보는 한인 엄마다. 반가운 김에 아이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는데, 아이도 한국 말하는 우리가 반가웠던 모양이다.
“할머니, 이것 가지세요. 냉동고에 넣어야 해요.” 고사리 같은 양손에 쥐고 있던 기다란 고드름 중 하나를 내민다. “할아버지 이름은 뭐예요?” 잔뜩 호기심에 찬 질문에 “고놈 참 똑똑하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예, 할아버지.” 올려다보는 까만 눈이 초롱초롱하다.
얕으막한 평지에 키 작은 아파트는 단독 주택과 달리 많은 동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스쿨버스에서 오르내리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시간 별로 등하교하는 학생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그 중에서도 한인 아이들이 유독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관심과 노파심 때문이다. 혹시나 얼굴색이 다른 아이들과 편견이나 인종 차별로 힘든 학교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하고.
미국에서 자라 뿌리를 내리고 사는 우리 자손에게 노부모와 부모세대가 함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건 고유의 전통과 한국말일 것이다. 이민 초창기 시절에는 영어만이라도 잘 구사해서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부모가 자녀를 지도했다면, 지금은 세계가 한 울타리 속 같아서 한두 가지 외국어를 섞어 사용하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유리하다는 것이 대세로 변해가고 있다.
매주 주말이 되면 한국학교 마다 어린이들을 위해 한국어는 기본이고, 사물놀이와 태권도, 미술, 고전무용 등 다양하게 한두 가지씩 적성에 맞는 과목을 지도하고 있다. 특별한 기념일에는 갈고닦은 솜씨로 작품 전시와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나머지 힘껏 박수도 쳐주고 웃음으로 안아주고 사랑으로 힘을 실어준다.
이미 이민 1세대는 대부분 경제활동을 접고 아무 속박 없이 손주들을 돌봄과 함께 재롱을 재미삼아 세월을 보낸다. 개개인의 이민 역사가 힘들었던 만큼 미국생활을 사명감처럼 고수하며 살아왔던 이유도 우리 아이들이 콩나물 자라듯 쑥쑥 자라 한국인의 후세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 주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의 총수는 약 2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민 1세대가 초석이 되어 다져놓은 길 위에 올해도 이민 2세대가 연방하원에, 또는 시의원에 선출된 것을 비롯해 각 주마다 한인들의 활동이 눈에 띠게 드러난다. 더욱이 CNN방송에서 여성 앵커로,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에서 선임 여성기자로 맹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은근히 한국인의 자긍심을 느낀다. 1세대의 기운을 이어받아 마라토너처럼 달려 열정과 실력으로 꿈을 이루어 나가는 다음 세대의 무한도전을 신문지상에서 읽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눈 한번 크게 뜨고 사방을 훑어보면 세분화된 직종이 남녀 구분 없이 무수히 널려있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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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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