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전원생활은 노년을 살아가기에는 여유로움을 주지만 자칫 적막감에 빠져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사회생활에서 얻어지는 언어소통이나 이웃과의 왕래에서 오는 소소한 즐거움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대화 상대는 오로지 남편뿐이다. 늦은 나이에 넓은 미국 땅에서 몇 년을 살면서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나를 두고 주위에서는 안타깝다 못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라는 격려에도 누누이 핑계를 댄다. 이미 운전대를 놓은 사람이라면 운전에 집중하는 대신 남편의 옆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물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좋은데 어찌 두 마리 토끼를 단번에 잡을 수 있느냐고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내가 핀잔을 준다.
65세 이상을 노년으로 간주하면 강산이 한 번 더 지나 간 세월인데 잘 나가던 운전 솜씨도 자신감을 잃게 된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70대 노인이 차를 몰고 병원문을 향해 돌진하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있던 사람을 덮치는 아찔한 사고 장면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황당한 실수였다. 신호등에 걸리는 것쯤은 젊은이도 흔한 일이지만, 눈이 어두워서, 행동이 굼떠서, 브레이크를 잘못 밟아서…. 이래저래 접촉사고 소식을 듣노라면 남편 옆의 조수석이 내겐 딱 안성맞춤이다.
아이들 건사하느라 왼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로 흐느적거릴 때 일이다.
“질부야, 심심해서 못 살겠다. 누가 날 어디든지 데려 갔으면 좋겠구나.” 평소에도 편안한 노후를 아들 내외와 함께 보내고 계셨던 시이모님의 축축한 말씀에는 외로움이 흠뻑 묻어 있었다. “이모님,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경로당에라도 가셔서 노시다 오세요. 조만간 인사드리려 저희들이 찾아 뵐 게요.” 가끔씩 어머님 보듯 막내 시이모님 집에 가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들어 드리곤 했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무척 그리우셨나 보다.
그러고 보면 어머님도 모처럼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집안에만 계시는 시간이 행여 무료해 지실까봐 일부러 소일거리를 만들어드리면 눈에 띄게 좋아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노인과 아이의 닮은 특징임을 어찌 알았으랴.
어린 시절 친정집은 대가족인데다 왼 종일 사람 왕래가 잦았던 역전 대로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골에서 올라오는 먼 친척들은 으레 거쳐 지나가는 정거장 같은 집이었다. 크고 작은 짐 보따리를 들고 와 잡다한 시골 이야기를 밥상에 올려놓고 시끌벅적 얘기꽃을 피우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곤 한다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어쩌다 싫은 내색이라도 할라치면 “사람은 사람의 온기를 먹고 살아야지.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다면 그건 산다는 것이 아니야.” 엄마가 우리에게 들으라고 곧잘 하시던 말씀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겹겹이 끼었던 아집과 집착의 굴레를 어렵사리 벗겨내고 나니 슬그머니 외로움이 찾아 든다. 노년의 적은 돈도 명예도 아닌 외로움이라는데, 타국 천지에 사람이 널려있다 한들 황량한 군중 속의 고독일 뿐이다. 이제는 내 곁에서 항상 말없이 친구가 되어주는 남편과 사철 쉼 없이 신선한 공기를 내뿜는 자연이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나를 숨 쉬게 한다.
노년의 삶을 아름답게 노을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 부부는 매주 금요일이면 시니어 센터에서 각자 혹은 함께 강의실에 들어가 강좌를 듣는다. 그날은 앉은 자리에서 점심도 해결하고, 날씨가 좋을 때는 공원으로 또는 집 근처 확 트인 목장으로 드라이브하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과 소떼들,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도 감상하고, 이따금 집밥이 싫증나면 먹는 게 남는 것이라 외식도 하는 유유자적한 나만의 전원일기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
윤영순 우드스톡,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