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내가 운전대를 잡고 직장으로 가는 도중 길목에서 두터운 잠바 차림으로 두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이야기 하면서 걷고 있는 모습을 차 창문 넘어로 그 사람이 우연히 보았다. 여기 볼티모어의 아침은 그렇게 춥지 않고, 그냥 선선 할 정도의 체감 온도를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기온이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날씨 차이에 따라서 두터운 겨울 옷을 입거나, 아니면 시원한 여름 옷 같은 것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저 여인네들도 우리가 가끔 보는 그들과 다를 게 없네요”하면서 “참, 자유로운 영혼들이야” 나에게 속삭이듯 그녀의 말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란 그 말을 집사람으로부터 듣는 순간 왠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주변 또는 방송 매체에서 자주 들었기 때문이 아닌기 싶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찰라 ‘자유로운 영혼’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은근히 생겨 나기 시작했다.
안사람과 내가 본 그 젊은 여인들의 옷차림 뿐만 아니라, 가끔 우리 가게에 온 손님 중에는 남녀가 같이 와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약간 지나칠 정도의 애정표현를 하면서 내게 맑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무색할 정도로 놀랍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모습들이 동양인인 나에게는 어색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쑥스러울 정도의 행동이나 행위가 그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그런 생활 습관에 길들어져온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예의범절, 체면, 상황 여건에 상관하지 않고 자유분망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사람이 정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급격히 변화 하는 한국의 문화가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오랜 삶을 거침없이 살아온 나는 다시 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자라오면서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을 거치면서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가르침과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훈육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해 나갔다. 쉴 틈 없이 예정 된 시간표처럼, 나 만의 자유로움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끝자락 단계의 교육 과정을 밞고 사회로 진출했다.
나는 그곳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의 조직 생활에서 상사의 눈치는 물론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높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여유없이 살아온 내 인생살이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감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보상 심리라 할까.
문득 내가 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네! 이 참에 나도 체면, 예의범절과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머리와 마음이 시키는대로 한 번쯤 ‘자유로운 영혼’이 깃든 내가 된다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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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찬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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