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께서는 1598년 양력 12월 16일, 음력으로는 11월 19일 임진 7년 전쟁의 마지막 노량해전 중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하셨으니 올해로 423주기가 된다.
한해 전인 1597년 4월 13일에는 이순신의 억울한 백의종군 파동으로 어머님 변씨가 여수로 부터 아산 본가로 오는 뱃길에서 선상 객사하셨고, 10월 14일에는 한달 전 9월 16일 장군의 불가사의한 명량대첩에 허를 찔린 일본군의 보복으로 본가를 지키던 셋째 아들 면이 전사했으니 단 두해 만에 모, 자, 손 3대가 운명인 양 나란히 손잡고 국난에 목숨을 헌사하시는 기막힌 드라마를 연출하신 것은 아닐까. 헤아릴 수 없이 거룩한 공의 속마음을 한편의 시에 기대어 더듬어 보기로 한다.
기록에 따르면 충무공의 자작시는 20여 편에 이르는 것으로 회자 되지만 실제 인용할 만한 작품은 열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큰 칼 옆에 차고…’ 로 시작되는 ‘한산도가’이지만 필자는 공의 심상이 가장 깊고 폭넓게 드러나는 이 제목없는 시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연을 풀어 보면 임진왜란 초반 선조 임금이 서울 한양을 버리고 평양, 의주로 피해가는 바람에 정부 체제가 무너져 명령과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어이 없는 상황을 당하여 차라리 자기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시고, 둘째 연에서는 자기의 본분인 국토방위는 감당할 자신감을 보이면서 오히려 거리에 허둥대는 난민 구제를 하실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고 계신다. 이는 봉건 왕조시대에 나라의 기본은 백성이라는 민본주의 사상을 지니셨음을 드러내는 놀라운 심성의 표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번째 연에서는 혹독한 장수의 간난과 전쟁의 참상을 극적으로 그려내시면서도 마지막 연에서는 전쟁없는 화평의 시대를 이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옛날처럼 복건 쓰고 냇가에서 돌베개 베고 누워 자족하는 반전의 평화인을 한없이 그리워 하셨음을 알게 된다.
칼을 든 무장 이순신은 놀랍게도 시냇가 바위 위에 돌베개를 베고 눕고 싶은 간절한 평화인의 꿈을 이루시지 못한 채 안고 떠나신 것이다. 어허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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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 이순신 숭모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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