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 무브먼트 이관수 셰프
새벽 다섯 시,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골목 한 건물 지하에 불이 켜진다. 주방에서 물을 한 솥 끓이는 동안 이탈리아에서 온 커드를 꺼낸다. 커드는 우유를 응고시켜 만든 치즈의 원형. 이관수(38) 셰프는 측정기를 꺼내 커드의 산도를 잰다. 결과에 따라 소금양을 조절하고 뜨거운 물을 커드에 부어 녹인다. 주걱으로 젓는 것과 동시에 녹아 흐물거리는 커드를 길게 늘어뜨리는 일을 반복한다. 흘러내리는 죽 같은 질감이 탄성을 얻으며 매끈해질 때까지 작업은 계속된다. 치즈의 당일 생산·판매를 원칙으로 하는 프레시 치즈 레스토랑 '무브먼트'의 아침은 매일 이렇게 시작된다. 모차렐라, 부라타 치즈의 이름은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 매일 만들어 파는 프레시 치즈 개념은 아직은 생소하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원유를 받아 치즈를 만드는 게 거의 불가능한 산업구조적 문제도 있지만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이다보니 생산성도, 가격경쟁력도 낮다. 한마디로 고된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셰프는 매일 신선한 치즈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2년째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 우유 본연의 향과 맛 살린 '프레시 치즈'이 셰프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을 다녔고 생화학을 전공했다. 부모의 기대와 달리 그가 택한 길은 요리였다. 인도에서 인턴을 하며 맛본 이국적인 음식에 마음을 빼앗겨 스물여섯 살에 미국 CIA 요리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미국 시카고의 '팻 라이스',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상'에서 일하다 2019년 팬데믹 직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의도치 않게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이탈리아 패션회사의 F&B 총괄 셰프로 일하다 치즈와 인연을 맺게 됐다.
"프랑스에서 배운 화려한 요리보다는 언젠가 재료로 승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한국에 신선한 우유 맛을 내는 제대로 만든 프레시 치즈가 없다는 이탈리안 동료의 말에 이거다 싶었죠." 이 셰프는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며 모차렐라와 부라타를 만드는 공정을 익히고 맛봤다. '일단 만들면서 배우자'는 마음으로 2023년 무브먼트를 열었다.
한국에서 원유를 구해 치즈를 만드는 건 어렵기에 대신 만들어진 커드를 수입해 치즈를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매일 직접 만든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제조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는데 뜻하지 않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커드의 모양이 냉동 슈레드 모차렐라와 닮아서다. "커드는 치즈가 아닌 일종의 원재료예요. 이탈리아에서도 산지가 아닌 이상 커드를 써서 프레시 치즈를 만들어요. 치즈가 빵이라고 한다면 커드는 밀가루 같은 거죠."
이 셰프는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강조한다. 한국 시장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모차렐라나 부라타는 만들어진 시점에서 수일에서 많게는 수개월이 지난 것들이다. 냉동과 해동, 유통 과정을 거치며 치즈 안에 있던 우유 본연의 향은 사라지고 질감만 남는다. "보존료를 넣거나 산도를 더 낮추면 오래가죠. 하지만 그건 더 이상 프레시라고 부를 수 없지 않을까요." 이 셰프가 추구하고 지키고 싶은 건 신선함이란 가치다. 그의 모토는 갓 구운 빵처럼 오늘 만든 치즈를 오늘 파는 것이다.
■ 다양한 재료로 채운 부라타무브먼트의 시그니처는 '무브라타'라고 하는 속을 다양한 재료로 채운 부라타다. "꼭 한국의 만두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꼭 스트라차텔라로만 속을 채워야 할까 싶어 처음엔 바질페스토를 한번 넣어 만들어 봤죠."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납득하기 어렵다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인들의 비난이 거셌다.
"이건 부라타가 아니다, 동양인이 이탈리아 치즈를 망쳐놨다는 댓글도 달렸죠. 근데 저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니까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게 오히려 강점이라고 봐요." 일부의 우려와 달리 복숭아, 팥, 무화과, 밤, 단호박 등 계절 재료로 만든 무브라타는 한국에서 재미도, 맛도 있는 치즈로 여겨졌다. 한 달에 한 번 신제품이 나올 때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단골 고객층이 생겼다.
일부 레스토랑엔 치즈를 공급도 한다. 대형 유통망이 아닌 셰프와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방식으로, 냉장 택배가 가능한 소량 주문만 받는다. 수입 냉동 제품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신선함이란 가치를 알아봐 주는 이들이 있다. 서울 성수동과 청담동의 레스토랑부터 경남 창원의 작은 피자집까지, 신선함을 이해하는 셰프들이 주 고객이다. "나폴리 피자를 만드는 분들이나 이탈리아 요리를 하는 셰프들은 알아요. 냉동 제품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우유 향과 탄성을요."
초기엔 택배 고객 불만이 많았다. "치즈가 시다, 너무 무르다, 왜 안 늘어나냐 같은 피드백을 많이 받았죠." 그는 패키징, 보존액 농도, 염도 조합을 바꿔가며 데이터를 쌓았다. "배송으로 하루가 더 소요되는 택배용은 매장용보다 더 연하게 보존액을 맞춰야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맛이 좋아졌다는 피드백이 늘더니 재구매율 상승이란 결과로 돌아왔다.
■ "커피처럼... 원유 맛으로 구별되는 치즈 시장 만들고파"앞으로의 계획은 규모의 확장보다 '깊이의 확장'이다. 그는 우유의 원료와 커드의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금은 이탈리아 커드를 쓰지만 언젠가는 각 지역의 우유를 직접 다뤄보고 싶어요. 홋카이도든, 강원도든, 목장의 맛이 다른 치즈를 만드는 거죠. 물론 쉽진 않겠지만요." 장기적으로는 커드를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테루아르(산지 특성)를 담은 소재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이다. 커피가 원두의 산지로 구분되듯 치즈도 원유의 맛으로 구별되는 시장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새벽마다 가게로 향하는 매일의 노동은 치즈의 산도(pH), 커드의 수분, 손의 압력까지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게 했다. 처음 치즈를 시작할 때는 폐기량이 생산량의 30%였는데 지금은 5% 미만 대다. 반복과 꾸준함이 준 선물이다. 그는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문을 연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지만 치즈는 매일 다르다. "왜 매일 만드냐고요?" 그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매일 만들어야만 아는 게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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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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