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홍목사(시인)
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 독재와 대학생들의 데모 열기가 뜨겁게 대립되던 때였다. 그 때 송사리들이 자라 이제 한국 정치의 주역들이 되었다. 노무현, 한명숙과 그녀의 남편, 김근태, 유시민...등 등. 정부로부터 쫓기던 한 학생이 찾아와 숨겨 달라고 사정해서 숨겨 주었는데 그 후 지방에서 체포령 받은 자, 한국 데모의 선두에 있던 대학교 후배 등이 내 우산 밑으로 속속 들어와 나는 정부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솔직히 개척교회로 여념이 없던 나는 민주화운동을 안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터인데, 내 우산 속에 들어온 자들을 내쫓을 수도 없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명동 성당이 정부의 압력에 흔들거리고 국회에서 이름값을 하던 여당 의원 김성곤 씨가 그리고 한국의 양심과 지성이던 함석헌 선생의 수염이 중앙정보부에서 뽑히던 시절이다. 일개 무명 목
사인 나는 잡혀가면 시체도 못 찾을 것이 뻔하였다.S 대학에서 삼성그룹이 2명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던 이주영이란 학생이 데모로 제명
당했다. 그는 나의 전도를 받고 우리 교회에 나오던 학생이다. 그가 어느 날 찾아와 이런 고백을 하였다. 데모를 하다가 잡혀가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하였단다.
물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 등. 그런데 그 중 가장 힘든 것은 자기가 어릴 때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데 케비넷 같은 곳에 집어넣고 목발 없이 하루 종일 세워 둔 것이 정말 힘들었단다. 온 몸이 피가 쏟아지는 것 같은 그 고문은 그에게 형용키 어려운 일이었단다. 아직도 그런 고문이 실시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나라의 역사가 준 뼈아픈 어느 젊은이의 고난사(苦難史)이다.나는 미국 유학 후 한 가지 결심한 것은 그를 미국에 빼돌리는 일이었다. 그가 아는 미 공군 대령에게 자기를 미국에 몰래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양국 문제로 비화 될 가능성이 있
어 불가능 하다는 대답을 듣고 실망이 컸단다. 그 때는 이미 정부의 낙인이 찍혀 취직도 할 수 없고 학교도 다닐 수 없는 처지다. 그의 꿈이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한국 의사와 큰 병원 간호원장 그리고 미국 의사를 동원하여 어릴 때 소아마비 증세가 이상이 있어 점검(Check-Up)하고 치료하는 조건으로 초청장을 보냈다.다행이 그의 형이 외무부에 근무하여 여권을 무사히 받고 미국 비자를 얻어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가 샌디에고 공항에 도착하는 날 내 가슴은 설레었다. 시간이 되어 공항에 도착하여 큰 가방 두 개를 들고 목발을 끌며 멀리서 그가 걸어오고 있을 때 그의 눈과 내 눈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오랫동안 끌어안고 말이 없었다.
그 해후(邂逅)는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의 자유는 예수를 통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는 영혼의 자유이다. 그런 자유는 아니지만 그는 독재 정치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그는 오와이오 주립대학의 학생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고 난 뉴욕으로 일자리를 얻어 떠났다. 소문에 예쁜 색시와 결혼도 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후 여러 곳을 떠돌고 살아 온 나와 소식이 두절 되었다. 벌써 27년 전 일이다. 보고 싶은 “그 때 그 사람”이다. 이제 조국도 민주화되었고 세상도 바뀌었으니 먼 추억으로 간직될 지나간 이야기 한 토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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