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1년 중 잊지 못하는 달이다. 여기 미국에서는 아버지날이 있어 아이들이 전화하며 선물도 보내오곤 한다. 나는 어릴 때 겪은 6.25 동란을 잊지 못한다. 세월이 반세기를 훌쩍 넘어 흘렀으나 아직도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있다.
6월 27일 새벽에 부모님은 대청마루를 뜯고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고 그 속에 귀중품을 담아 숨기셨다. 며칠 후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날 새벽부터 전기가 끊겼다. 그 날 아침도 공무원인 아버지는 직장엘 가셨는데 지방 좌익세력들이 사무실에 근무하러 나온 모두를 24시간 감금하여 이북기를 그리게 했다고 하셨다. 다음날 28일 아침에 비번을 핑계 삼아 사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오셔서 가족 6명을 데리고 간단한 피난 짐을 챙긴 후 효창동에서 걸어서 서강까지 갔다. 27일에 한강 다리가 이미 끊어지고 피난민들이 한강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원래 한강다리가 계획된 시간 보다 일찍 끊겨 많은 피난민들이 끊긴 다리까지 와보고는 갈팡질팡하였고 멀리서는 다리가 끊긴 줄도 모르는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계속 몰려갔다. 우리는 먼저 서강에 도착한 이웃 가족이 지방 좌익들의 방해로 강을 건너지 못함을 알았다. 우리 아버지는 옆집 아버지와 합세하여 그들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며칠간 영등포 친척집에 가니 돈을 보이면서 배를 태워 달라고 하니 그제야 두 가족을 건너 주었다. 아무튼 그 때 나의 기억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길에 폭격으로 맞아 널브러진 사람들, 피 흘리고 죽은 사람들, 너무나 처참한 광경들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우리 가족은 원래 평북 정주군에서 살다가 1947년에 월남하여 얼마 있다가 6.25 동란이 났으니까 일가친척이 별로 없는 실향민이었다. 멀리 흑산도까지 피난하였다가 한국이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이 수복된 후 집으로 오니 폭격으로 집이 없어져 버렸다. 그 후 한국은 그럭저럭 자리 잡아 가며 어렵게 그렇게 우리는 지금 까지 살아오며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쇠고기 파동으로 저렇게 촛불 시위를 계속하고 세계 뉴스 시간에 촛불 집회 대열이 어찌나 긴지 움직이는 불바다 같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불경기로 살기가 어려운 때에 고유가로 파업을 사방에서 하고 자우지간 정부와 잘 타협이 되어 어서 매듭짓기를 고대하는 마음뿐이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편안하고 잘 돼야 여기 미국에서 사는 우리 동포들도 신바람이 나지 않겠는가? 6.25 동란을 다시 상기하면서 이 어려운 때 일수록 서로 서로 허리띠를 동이고 기도하며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큰 어른들은 본향으로 돌아가며 시간은 계속 흐른다. 정말로 6.25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는 모른다. 나는 늙어 가면서 아버지가 더 그립고 보고 싶다. 평소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굳세어라 금순아’, ‘삼팔선의 봄’ 등 그 때의 노래가 지금도 막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런 조국이 있다. 그 조국을 지키려다 희생된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국군 장병들의 숭고한 뜻을 생각해 보라. 2세들에게 전해 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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