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이란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다. 아니 간첩도 한민족이니까 간첩조차도 아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지난날의 우리 선조는 슬픔을 많이 겪었기에 예전에 불렸던 노래 거의는 한탄하는 듯한 노래다. 노래로 그 나라의 민족성을 가늠한다고 한다. 노래란 마음을 나타내는 소리니까 말이다.
나에게 요즘 세상에 대한 정보를 주는 사람, 특히 학생이 없는 관계로 요사이 불리는 신 가곡을 모르는 가운데 지내고 있다. 그래도 예전에 남들보다 곱고 맑은 목소리를 지녔던 덕으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여러 가지의 많은 노래를 알고 있다. 신세대의 노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해도 예전에 불렀던 노래를 모두 부를 것 같으면 아마 내 목소리에서는 쇠 긁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한창 나라의 형편이 암울했던 시대에 불렀을 듯싶은 ‘희망의 나라로’를 들으면서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시대에 살면서도 더불어 힘을 얻곤 한다.
그런데 워낙 내 삶이 정지된 듯 느껴져서인가 나는 가요 중 ‘비가’를 부르면서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 음률에 빠져 같은 기분을 느끼는지라 우리의 노래를 들을 때면 더불어 내가 침잠해가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렇지만 나는 노래 아닌 노래인 정신으로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놓이든 간에 ‘기사회생’의 힘을 얻는다. 그 노래가 슬퍼서 좌절감이 느껴지는 기분을 준다 해도 과연 그 노랫말에 취해서 현재 지내는 삶의 의욕이 잃어질까 하는 의문을 쥐어본다.
지금의 내 형편 때문인가 나는 조신하게 부르는 노래를 즐긴다. 그럴지라도 역시 밝은 노래를 들으면서 세상에서 지낼 힘을 얻곤 한다. 나의 본연 깊은 곳에서 이제는 슬픈 가락의 노래는 노 땡큐 하기 때문인가 몰라도 이제는 처량한 곡조가 싫다. 조용하고 단조 가락으로 흐르는 노래를 듣자면 더불어서 내 형편이 느껴져서 화가 나기에 그렇다.
신세한탄과 이별 따위를 부르던 가요조차도 신선함이 느껴질 정도로 긍정적이고 밝은 노랫말과 음률을 보이고 있다. 언제부터 부렸는가를 알지 못하는 한탄조의 민요인 ‘아리랑’도 지금은 밝고 빠른 템포로 부른다. 이건 아마도 지금 내 조국에서 지내는 모두가 진취적이고 희망을 보듬고 지내는 대문으로 해석이 된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 관심을 털고 산다. 그래서 석 달인가에 한 번 내는 신문 구독료를 낼 부담감도 없고,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 된 사건으로 해서 열 받을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구석기시대 원시인인 김 부 순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하여간 내게 애틋한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리워할 조국이 있다 함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지금 CD에서는 병사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있다. 너무 음악적 재질이 넓게, 골고루 주어진 탓인가 싶게 아직은 우리가 만든 음악이 세계적으로 연주되는 것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카라얀과 같은 대 지휘자가 우리 작곡가의 조국을 대변하는 교향곡을 음반에 수록한다면 그 음악을 들으면서 내 가슴은 뿌듯해할 건데 말이다.
그럴지라도 고향의 봄, 선구자 등 우리만의 노래가 내가 어느 곳에서 지내던지 민족의 혼, 민족의 정기를 지켜 주리란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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