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옹의 스승이였던 류영모 선생은 인류의 근원을 하늘에 둔다. 그는 말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곧이 곧장 일어설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온 탓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모든 초목이 태양에서 왔기 때문에 언제나 태양이 그리워서 태양을 머리에 이고 태양을 찾아 하늘 높이 곧이 곧장 뻗어가며 높이높이 서 있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언제나 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을 그리워 한다는 말을 진리를 그리워한다고 해도 좋을 듯 싶다. 그 이유를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고, 공자는 중용에서 “천명지위성(사람 속에 깃들여 있는 하늘의 천성)”이라고 했다. 그렇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그리워한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인가? 진리는 무엇인가? 노자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정의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듯, 진리도 정의할 수 없기에 진리라는 말이다.
노자의 도에 대한 표현은 ‘무엇이다’라는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무엇일 수 없다’는 부정적인 표현이 더 많다. 이러한 예는 힌두교에서 궁극 실재인 브라만을 두고 이야기할 때 쓰는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없다(neti-neti)’는 표현과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궁극 실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 한다. 따라서 진리는 긍정의 길이 아니라 부정의 길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진리에 대해 알려면 진리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진리를 만나려면 먼저 버려야 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를 가리켜 진리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 오직 예수만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도(道: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노자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예수가 자신을 진리라고 말했다면 그렇다면 예수는 진리가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노자와 예수의 갈등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성육신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이기를 스스로 포기했기에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면, 십자가 사건은 자기 스스로를 진리라고 말했던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버림으로서 그는 영원한 진리였음을 증명한 사건이다!
예수는 진리로서의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림으로 자신이 참 진리임을 보였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버려라! 그러면 만난다! 죽기 전에 먼저 죽으라! 그래야 산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계시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절대를 그리워 한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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