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가난한 이민자로 바다를 건너왔거나 그 이민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도 열심히 일하고 운이 따라주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미국이라는 믿음은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꿈을 이뤘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단어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가 커크 커코리언이다. 1917년 프레스노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계 이민자를 부모로 태어난 그는 8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야채상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을 여러번 들어먹는 바람에 렌트 비를 내지 못해 어렸을 때 최소 20번은 이사를 다녔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는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 잘 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9살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며 생활비를 보탰고 복서로 링에 뛰어들어 돈을 버는가 하면 2차 대전이 터지자 항공기 조종술을 배워 군 수송기를 캐나다에서 영국으로 나르는 일을 해냈다.
전쟁이 끝나자 중고 군수송기를 개조해 파는 사업을 해 이익을 남겼고 그 돈으로 항공사를 차려 그 때 막 뜨기 시작한 라스 베가스로 LA 연예인들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와 라스 베가스, 할리웃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가 큰돈을 만지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지금 시저스 카지노가 있는 자리에 80에이커 땅을 사면서부터다. 이게 대박이 나면서 그는 그 돈으로 MGM 스튜디오를 사들이고 라스베가스에 인터내셔널 호텔을 열었다. 이를 발판으로 1973년에는 라스 베가스 최대 규모인 MGM 그랜드를 세웠고 20년 뒤에는 아직도 서 있는 제2의 MGM 그랜드를 열었다. 그는 그 후 MGM을 비롯한 여러 비즈니스를 사고팔며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한 때 LA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90년대에는 크라이슬러를 인수하려다 실패했으나 이 과정에서 투자액의 3배인 50억 달러를 챙겼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그는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그는 알려진 것만 최소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한번은 이혼한 아내가 사상 최고 액수의 자녀 양육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커코리언의 변호사가 자기 전화를 도청했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변호사가 유죄 평결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이 자녀는 커코리언의 자식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전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옷을 차려입고 은행가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도 정말 싫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커코리언이 15일 베벌리 힐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8세. 그의 재산은 40억 달러로 추산되며 두 딸의 이름을 딴 회사와 재단이 남아 있다. 파란만장한 이민 2세의 삶을 산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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