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인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이 있기까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독립선언서 기초 작업을 하는 등 핵심적 역할을 했다. 1797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물러나고 애덤스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제퍼슨은 부통령으로 함께 일했다.
그런데 1800년 대통령 선거에 제퍼슨이 출마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졌다. 대권 앞에서 우정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두 사람의 상호 비방은 극에 달했다. 미국에서
네거티브 캠페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애덤스 선거진영과 제퍼슨 진영은 온갖 흑색선전을 동원해 상대방을 헐뜯었다. 요약하면 애덤스는 ‘바보에 위선자이고 범죄자이며 폭군’이라는 것이고, 제퍼슨은 ‘약골에 무신론자이면서 난봉꾼에 겁쟁이’라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이 과정에서 제임스 칼렌더라는 협잡꾼까지 고용했다. 칼렌더는 ‘애덤스가 프랑스를 공격하려한다’고 중상 모략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넘어갔다. 제퍼슨이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배경이다.
이어 제퍼슨은 재선에도 성공, 바라던 대통령 자리를 8년간이나 차지하지만 흑색선전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칼렌더가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칼렌더는 애담스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로 징역형을 살았다. 그리고는 1801년 석방되자 그는 제퍼슨에게 뭔가를 잔뜩 기대했지만 제퍼슨은 냉랭했다. 그러자 그는 시리즈 기사로 제퍼슨의 사생활을 폭로했다. 제퍼슨이 흑인 노예와 바람이 나서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다섯이나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예와의 혼외정사 스캔들은 정치인 제퍼슨에게 두고두고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정책 없고, 이슈 없고, 바람 없는 선거일수록 기승을 부리는 것이 비방전이다. 한국의 4.13 총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물이나 정책으로 상대를 누를 수 없게 된 후보들이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흑색선전을 동원해 선거 분위기가 혼탁하기 그지없었다. 선거 문화가 수십 년 전으로 후퇴한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이다.
이번 선거의 특징은 ‘돈 선거’가 줄어든 반면 ‘흑색선전’이 급증했다는 것. 그 중심에는 SNS가 있다. 라면 하나만 대접해도 SNS에 바로 오르니 ‘돈 선거’는 생각도 못할 일.
한편 SNS에 올린 내용은 단기간에 사실 확인이 어려운 반면 순식간에 퍼져나가니 네거티브 캠페인에는 안성맞춤이다. 묻지마식 유언비어 유포가 이번처럼 기승을 부린 적도 없다고 한다.
흑색선전의 대가는 언제든 치르게 되어 있다. 눈 밝은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을 할 수도 있고, 선거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당선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오랜 우정을 저버렸다면 이 또한 허망한 일이다.
애덤스와 제퍼슨은 선거전으로 원수가 되고 12년 후 다시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구가 되었다. 이후 10여년 편지로 우정을 이어간 두 사람은 1826년 7월4일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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