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저녁 때에는 또 무엇을 해서 먹나 생각하다 오늘은 냉장고에 버섯이 잔뜩 있으니 버섯탕수를 해야지 하고 무엇 무엇이 필요할지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문득 오랫만에 남편친구 부부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 떠올랐다.
순간 정말 오랫만에 갖게 되는 저녁식사 준비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진작에 만끽하지 못한 속상함이 쓰윽 스쳐간다. 마치 학창시절 쪽지시험 공부를 밤새 열심히 하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잊어버리셔서 시험을 안 볼 때 허망했던 그 마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음식을 만든 것도 아닌데 이리 분한 걸 보면 나도 살림에 꽤나 지쳐 있나 보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은 마땅히 시켜 먹을 음식도 없고 가까운 곳에서 사먹기도 마땅치 않아서 삼시세끼를 거의 매일 해야 되는 어려움 때문이라고 둘러대 본다.
문득 젊은시절 공부에 재능이 별로 없던 동네 여학생을 가르쳤을 때 그 학생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저 때는 공부가 저렇게 하기 싫고 내 나이가 되면 살림이 이렇게 하기 싫고...” 살림의 어원은 “살리다” 여기에 명사형어미 “ㅁ”이 더해져 살림이 되었단다. 매일 누가 좀 해줬으면 하던 그 일이 가족과 가까운 사람을 살리는 값진 일인 것이다. 살림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아름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정성이 그들이 이 힘든 세상에서 건강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데.....
살림이 하기 싫을 땐 조그만 살림살이 하나라도 장만해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신혼 때는 소꿉놀이하듯 재미있게 살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십년 삼십년된 살림살이들...... 그것들을 지나 부엌 구석에 놓여있는 조리용구 통에 지금까지 이민생활을 같이 했던 손잡이 없이 꽂혀 있는 낡은 국자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새 국자를 하나 장만해야지. 그러면 잠시나마 새국자 쓰는 즐거움으로 조금이나마 살림의 활력소가 생길 테니까......
요리의 재료도 풍성하고 좋은 조리용구도 너무나 풍성한 요즘 살림을 하기 싫어 했던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살림의 신은 아니더라도 살림꾼은 되어야겠다고 앞치마의 허리끈을 꽈악 동여 메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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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씨는 서울 토박이로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이민온 지 19년이 되었다. 미국에서 수년간 한국학교 교사를 했고 지금은 서양화를 그리고 있다. 그림과 글이 담긴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꿈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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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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