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는 것처럼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미련없이 떠날 수 있을까? 이제 할 일 다하고 자녀들도 자리잡았으니 운명대로 미련없이 갈 것이라고 평소에 말은 했지 준비는 안하고 있었다.
좋은 글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읽을 때뿐, 머리로만 알고 가슴은 짐짓 모른 체하며 살아왔다. 내 삶의 종점이 어디인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모르는 지점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난감하다.
쓰지도 않고 관상용인 저 비싼 그릇들. 일상생활이나 분위기에 안 맞아 일년에 한두번 입고 모셔놓은 옷, 가방들. 살아 있을 때 주어야 가져 가겠지. 아니 옷 같은 건 취향도 칫수도 안 맞아 누가 고맙다고 받아갈 리도 없다. 그릇은 며느리에게 주면 어떨까. 모던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영국제 본 차이나는 구세대 것이라고 싫어할지도 모르지. 받아서 안 쓰기도 그렇고 부담주게 될지도 모르니 가기 전 정리해야지. 아 가소롭다.
가는 마당에 이런 부질없는 생각까지 하니 얼마나 내가 잘 못 살아온 것인가. 평소에 손주들 대학 갈 때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럼 미련없이 떠나갈 거라고 말했지만 만약 그때까지 산다 해도 더 욕심이 생기겠지. 이제 죽음이란 글자를 앞에 두고는 머릿속이 거미줄처럼 갈래갈래 이어져 나간다. 마음 비우기라고 글도 썼었고 항상 지줄대지만 작은 일에도 화내고 오해하고 내 기분대로 살아온 것 같아 후회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날 위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래. 난 세계 많은 곳을 여행도 했고 좋은 음식도 먹고 한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도 했었잖아. 세계 속의 미국, 거기서도 특별한 실리콘밸리, TV 방송국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며 기량도 발휘했으니 미련 가지면 지나친 욕심이잖아. 불치병이 Why me? Why not me!세상만사 일체 유심조, 내가 즐겨 쓰던 말인데 이렇게 갈팡질팡하면 안 되지. 내일 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식구 먹을 반찬을 만들어야지. 곰국도 끓이고 멸치볶음에 오징어무침에 오이지도 담고 나박김치도 담고 좋아하는 총각김치도.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더 급하지. 가깝다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말을 아끼고 살아온 건 아닐까. 살면서 정말 마음 상한 일도 미운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별것 아니었던가. 그래. 모두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지. 아직 말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
<
장금자(시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