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 147cm의 작은 거인 슐레이마놀루 타계
▶ 역도 올림픽 3연패·세계선수권 7연패 위업

터키의 한 팬이 18일 세상을 떠난 나임 슐레이마놀루의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

나임 슐레이마놀루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바벨을 드는 장면. <연합>
세계 역도의 역사를 바꾼 ‘세기의 역사(力士)’ 나임 슐레이마놀루(터키)가 눈을 감았다.
터키 언론은 지난 18일 “슐레이마놀루가 터키 이스탄불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고 보도했다. 향년 50세다.
슐레이마놀루는 2009년부터 간 부전에 시달렸고, 지난달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당초 성공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슐레이마놀루의 몸 상태는 최근 급격히 악화돼 결국 이날 숨을 거뒀다.
짧지만, 강렬한 삶이었다. 슐레이마놀루는 147㎝(4피트 11인치)의 작은 키였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도 선수다. 팬들은 그에게 ‘포켓 헤라클라스’란 별명을 선사했다.
특히 터키인들에게는 특별한 영웅이었다. 불가리아 내 소수 민족 터키계였던 슐레이마놀루는 1986년 망명을 감행했다.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18세였던 1985년에 이미 남자 역도 60㎏급 세계 기록을 세웠다. 주변의 터키인들이 슐레이마놀루에게 망명을 권했다. 그는 “불가리아 정부가 내 터키식 이름을 개명하라고 요구한다면 망명할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사건이 일어났다. 1986년 초, 불가리아 정부는 슐레이마놀루에게 불가리아식 이름인 ‘나음 슐레이마노프’라고 적힌 새 여권을 발급했다. 동시에 불가리아 언론에서는 “이름을 바꾼 슐레이마노프는 불가리아식 이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거짓 기사가 나왔고 그로 인해 불가리아 내 터키계 사람들은 슐레이마놀루에게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슐레이마놀루는 1986년 12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역도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터키로 망명했다. 멜버른 주재 터키 영사를 찾아가 영국 런던으로 이동한 그를 위해 당시 터키 수상이 전용기까지 내줬다. 슐레이마놀루는 터키에 도착한 뒤 “나의 민족성이 담긴 내 이름을 바꿀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그는 터키의 영웅이 됐다.
플랫폼 위에서 슐레이마놀루는 더 위대한 선수였다. 터키는 불가리아와 분쟁을 막고자 100만달러의 위약금을 내는 성의를 보였다. 슐레이마놀루는 1987년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뒤,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터키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생애 첫 올림픽부터 강렬했다. 남자 60㎏급에 출전한 슐레이마놀루는 인상 152.5㎏을 들었다. 역도 역사상 최초로 인상에서 자신의 몸무게 2.5배 이상을 들었다. 이어 용상에서는 “사람은 자신의 몸무게 3배를 넘게 들 수 없다”는 통념까지도 깼다. 슐레이마놀루는 190㎏에 성공, 자신의 몸무게 3.18배를 들었다.
1989년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한 슐레이마놀루는 터키 정부의 간청에 1991년 복귀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며 역도 사상 최초로 올림픽 3연패를 달성했다. 술레이마놀루는 세계선수권 7연패와 공식 세계기록 46회 달성 등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록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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