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도서관은 희망이다. 미국에 살기 시작한 30년 전 이곳 도서관엔 한국 도서가 없었다. 다행히도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지인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신간을 가끔 보내주곤 했지만, 수화물 속 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잠시, 비싼 발송료를 보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러다 보니 부탁하는 햇수도 보내주는 햇수도 줄었다.
이민 초창기의 생활은 쉽지 않았고 가족 수가 많다 보니 오로지 나를 위해 지출해야 하는 책값은 당연히 생활비에 밀렸다. 그런 나를 위해 남편은 한국 책을 빌려주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한국 물건을 팔면서 한국 도서를 빌려주는 곳을 발견했는데 많은 분량은 아니었어도 기뻤다. 한 번에 가면 10권씩 빌려와도 2주면 다 읽어버리는 통에 규모가 작은 그곳에 더는 갈 수 없을 때쯤 다행히도 한국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주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 기쁨은 행복 그 자체였다.
주 7일 일을 하던 10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은 아이들과 소아과를 다녀온 후 함께 도서관에 가는 게 월례행사였다. 각자 읽을 책 10권씩을 고르다 보니 보통 50권을 가슴에 품고 집에 가는 날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신간 서적이라도 만나는 날은 책의 제목과 상관없이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부드러움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곤 했다. 아이들이 글을 잘 읽지 못할 시기엔 침대에 다섯이 누워 책 한 권을 골라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기도 하고, 때론 한 단락씩, 마지막엔 한국동화를 들려주곤 했다. 퇴근해서 아이들과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같이 읽었던 장면들은 아직도 또렷해 가슴이 벅차다. 그 시기는 온 가족이 같은 주제로 웃음과 사랑을 공유하였기에 아이들 키우는 맛을 제대로 맛본 시기였던 것 같다.
동포사회가 커져 한국 서점도 생길 때쯤 나의 경제도 조금 나아져 한 두 권 사보는 호사를 누려봤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혼자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전 못하는 막내를 위해 도서관에 다녔고 내 분량의 책을 빌렸지만, 예전만큼 잘 읽히지 않았다. 그래도 3주마다 꾸준히 다니다 보니 다행히도 몇 년이 지나자 책에 대한 사랑이 되살아났다. 막내가 운전면허를 따자 혼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좋았다.
지금은 예전만큼 한국 서적이 많지도 않고 신간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종이책을 읽는 세대보다 E-book(전자책)을 보는 세대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쉽게 수많은 정보를 얻다 보니 상대적으로 책을 보는 사람이 줄어든 것이다. 나 자신이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종이책이 좋고, 아날로그 공간인 도서관이 좋다. 도서관엔 나라별로 책들이 있는데, 갈 때마다 어느 나라 책이 많은가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국 책 양보다 특히 중국 책이 많아 보이면 괜히 심술이 나고 속상하다.
나에게 도서관은 주치의가 있는 병원이다. 나는 정기적으로 출입을 했고, 거기서 약봉지처럼 책을 빌리고 그것을 복용했다. 전혀 읽히지 않으면 다시 주치의를 찾아 다른 약을 받듯 꾸준하게 검진을 받았다. 그 약봉지 같은 책들을 거실에, 침실에, 그리고 차 안에 두면서 때론 보기만 해도, 책 겉면의 그림만 봐도 병이 낫는 것처럼 편안했다. 움츠렸던 세월 동안 책은 나를 토닥여주기도 하고 삶의 모순을 이해시켜 줬다. 활자들은 내 눈을 통에 몸속으로 분해되어 상처받은 곳곳에 머물며 아픈 딱지가 없어질 때까지 붙어있다가 기꺼이 내 속살이 되어 주었다.
거기다 비용 하나 받지 않고 치료해 주니 도서관은 나에겐 생명의 은인과 같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걸어서 도서관에 갈 수 있는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나의 노후 계획 중 하나다. 언젠가는 운전을 못 하는 시기가 올 것이고, 또 언젠가는 혼자 지내야 하는 시기가 분명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치의가 내 집 근처에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어깨가 절로 들썩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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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원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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