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집권한 2022년 5월부터 2년 반의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퇴행의 길을 걸었다.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는 금년 초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을 41위로 평가하면서 민주주의 후퇴와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까지는 한국을 행정부에 대한 사법적·입법적 통제와 시민적인 자유 보호, 그리고 법 앞의 평등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포함시켰으나 올해 평가에서는 한국을 제외시켰다.
전체적인 순위에서는 41위였지만 더 중요한 ‘심의민주주의 지수’(deliberative component index)에서는 가장 낮은 48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심의민주주의 지수’는 특정 정책이나 사안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 그리고 포용성, 상대에 대한 존중, 합의에 이르기까지 쏟는 노력 등을 아우르는 용어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취임 후 무려 2년 가까이 야당 대표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왜 이처럼 박한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웅변적으로 설명해준다.
하버드대학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지난 2018년 출간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자신들의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 신호를 소개하고 있다.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혹은 준수의지 부족(군사 쿠데타 등 헌법을 넘어선 방법을 시도하거나 지지한 적이 있는지, 혹은 선거제도의 정당성을 부정한 적이 있는지 등)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정치경쟁자를 전복세력이나 헌법질서 파괴지라고 비난한 적이 있는지 등)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경향(상대정당, 시민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지 등)이 그것이다.
두 학자는 이 가운데 단 하나만 해당돼도 독재자인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원래 저자들은 2016년 트럼프의 등장이 민주주의에 어떤 위협이 되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인데 우리에게는 마치 윤석열 진단서처럼 읽힌다.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신호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의 평가가 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한 국가의 민주주의 수준에 대한 평가는 권력자의 행태뿐 아니라 국민들이 보여주는 탄력성을 포함해 다면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지난 4월4일 윤석열이 파면되자 해외 유수 언론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깊은 분열과 권위주의적 도전을 이겨내며 성숙함과 회복력을 입증했다”고 입을 모았다. 뉴욕타임스는 “시민들과 제도가 즉각적으로 대응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평가했다. 실패할 수 없는 친위 쿠데타를 온몸으로 막아낸 시민들의 용기와, 한강 작가가 던진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인양 1988년 탄생한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판단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몰락으로부터 건져냈다는 얘기다.
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기본으로 움직이고 작동한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권력의 추가 이동되고 정치와 국가정책의 방향이 결정된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항상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드러나는,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결정이었던 것으로 판명되는 최악의 경우들도 적지 않다.
리처드 솅크먼은 유권자들의 선택에 부정적인 인식을 지닌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그는 ‘지혜로운 유권자들’이라는 믿음은 신화일 뿐이고,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 게 유권자들의 진짜 모습이며 현실이라고 꼬집는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9.11 테러였다. 테러 발생 후 정부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 잘못된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 바로 유권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솅크먼의 지적처럼 유권자들이 항상 최선의 결정,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의 호도와 잘못된 선동의 영향, 특히 소셜미디어 등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등장으로 소음이 한층 더 심해진 환경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가 더욱 어렵다.
하지만 어떤 현명한 국민들은 국가시스템의 작동 오류가 명백해질 때 시정과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을 뽑았던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을 인식하고 총선에서 여당에 참패를 안겨주는 등 집권세력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잇달아 보냈다. 어리석은 투표를 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바로 잡는 ‘자기교정’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체 또한 그 유권자들이라는 사실을 리처드 솅크먼은 간과한 듯하다.
‘대한국민’의 ‘자기교정’ 과정은 윤석열 탄핵 심판에서 국회 측 대리인을 맡았던 장순욱 변호사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되돌리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윤석열의 파면으로 오는 6월3일 치러지는 조기대선은 이런 자기교정 과정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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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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