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퇴임을 앞둔 2021년 11월. 남편 요아힘 자우어 훔볼트대 교수가 갑자기 언론 인터뷰에 나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당시는 독일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낮아 메르켈의 고민이 깊어가던 때. 분자화학 권위자인 남편 자우어가 이탈리아 언론에 등장해 “특유의 게으름과 현실 안주 성향 때문에 독일인 3분의 1이 과학적인 결과를 따르지 않으며 백신을 피한다”라고 밝혔다. ‘백신 기피’의 신념을 버리라 주장하며 우회적으로 아내를 돕고자 한 시도였다.
■ 독일인들은 자우어의 느닷없는 인터뷰에 놀랐다. 그가 ‘독일인의 성향’을 낮춰 보는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1년에 딱 한 번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에만 모습을 드러내 ‘오페라의 유령’이라 불릴 정도로 16년 동안 ‘퍼스트 허스밴드’ 역할을 피해왔던 인물이 전례없이 입을 열어서였다. 메르켈은 자서전에서 남편에 대해 ‘각자 자신의 일을 한다’는 말로 설명했을 뿐이다. “그저 시간이 허락할 때만 곁에 있다”는 조용한 배우자의 대표적 사례이다.
■ 정상의 배우자들 가운데 자우어와 상반되는 캐릭터도 적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의 아내 낸시 레이건은 자신의 사람을 대놓고 요직에 앉히기로 유명했다. 1987년 남편에게 비서실장을 해임하도록 압박했던 그를 폭로한 뉴욕타임스 칼럼 제목은 ‘퍼스트레이디의 쿠데타’였다. 그의 국정개입이 비난만 받은 것도 아니다. 유에스에이투데이는 남편에게 군축 협상을 촉구해 미소긴장을 완화한 사례를 들며 “레이건의 성공에 가장 기여한 인물”이라 그를 평했다.
■ 대선이 다가오면서 후보 배우자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김건희 여사 의혹으로 확인된 ‘배우자 리스크’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국민적 바람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인도, 공무원도 아닌 대통령 후보 배우자의 자질을 평가해 대선 투표에 임할 수는 없다. 자우어의 ‘그림자 외조’도 낸시 레이건의 ‘국정개입 내조’도 유권자 선택의 결과는 아니었다. 정작 후보 자격을 돋보이는데 집중하지 않으면서, 배우자의 자격을 토론으로 검증하자는 국민의힘의 제안은 유권자 관점에서도 생뚱맞지 않겠나.
<양홍주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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