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노인 게리 아라비안(72, 샌클레멘테 거주)은 나이 때문인지 가끔 아침식사 때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5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6·25전쟁 참전 기억만은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6·25전쟁 참전은 그의 70년에 걸친 삶 가운데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군인으로서 참전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참전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 속에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다. 생사에 대한 우려, 그리운 가족을 오래 만날 수 없게 된 것에 따른 좌절감… 다만 홀로가 아니라 다른 많은 전우들과 함께 참전한다는 사실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1947년 미 해병대에 입대한 아라비안은 전쟁발발 당시 남태평양 군도에서 훈련받고 있었다. 그는 50년 8월 전우 2만7,000명과 60여대의 군함에 분승, 샌디에고를 출발했다. 한달간에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인천. 그는 전쟁의 국면 전환을 가져왔던 인천 상륙작전에 동원됐던 것으로 인천의 월미도, 서울을 거쳐 압록강까지 진군했다.
그는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찾아온 추위를 견디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며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전쟁은 어리석은(stupid) 짓이라고 서너번 되풀이했다.
그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옥이 파괴되는 등 마을 전체가 폐허로 바뀐 것을 목격하면서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가 적의 총에 맞아 숨진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신발도 신지 않은 노약자와 어린이가 몸에 얇은 셔츠 한장을 걸친 채 추위 속에서 떨던 모습, 임산부가 총에 맞아 숨져 있던 모습 등 전쟁의 비극적인 참상은 두고두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덧붙였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에 대해 인간적인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아라비안은 ‘사람을 죽였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군과 적군의 전투가 치열해 지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죄의식을 느낄 틈 없이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고 말했다.
아라비안은 51년 9월 군인들의 근무지 순환방침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왔다. 77년에 제대한 그는 61년 한국을 한번 더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해 한국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라비안은 제대 후 캘리포니아주 고용개발국에서 근무했으며 여러 개의 미국 참전동지회에 관여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원들에게 상담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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