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이번엔 꼭 갈려구 했는데...... 장모님 먼저 보내시고 무척이나 외롭게 계실텐데. 정말 미안해요......"
미숙은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남편의 마음에 미숙의 코끝이 찡해왔다. 남편은 회사 일이 바쁘다고 했다. 그래도 자기가 출근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이 할 것이다. 그것은 페이 체크의 무게였다. 남편은 낮일보다 밤일에 수당이 붙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시간을 바꿔 일을 한지 벌써 3년이 넘었다. 거기다 오버 타임까지 하면 낮에 일하는 사람보다 주급이 더 많았다. 남편은 이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식 교육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돈 모아 규모가 적어도 자기 사업을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다.
"미안하긴, 이번에 못 가면 가을 추수 감사절 때 가면 되잖아요. 저녁은 드셨어요?"
미숙은 남편의 저린 가슴을 쓰다듬는 마음으로 딴청을 부렸다.
"그래,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꼭 찾아뵙자. 두꺼운 겨울 스웨터라도 사고."
"그래요. 우리 그렇게 해요."
미숙은 참았던 눈물을 흘리면 짧게 대답했다. 더 말을 하면 우는 목소리가 날것 같아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남편의 따사로움이 목에 휘감기는 것을 느꼈다. 미숙은 고운 남편의 마음에 투정도 부릴 수 없었고 말할 수 없는 믿음이 왜 그리도 서러운지 저려오는 서러움을 꺼어 꺼어 삼켰다.
미숙은 잠자고 있는 아들 옆에 가만히 앉는다. 새근거리며 잠든 아들의 머리 결을 쓸어 올려준다. 너두 이 다음에 아버지처럼 여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남자가 되어야한다.
새벽을 달리는 열차들이 가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철길을 달리는 기차들이지만 오늘 따라 애틋한 그리움을 뿌리며 달려가는 것 같았다. 고맙고 또 고마운 남편의 마음이 잠시 서러웠다.
미숙은 일어나 아버지한테 내려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내려놓았다. 미숙은 책상으로 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식탁 테이블로가 앉았다. 전화보다 조금 더 따사로운 마음을 전 할 수 있는 것이 편지라고 생각했다. 미숙은 한 자 한자 써 내려간다.
"아버지! 무남독녀 외딸 미숙이에요. 삼층 아파트 창가에서 파킹장을 내려보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미어 오네요.
아버지 죄송해요. 이번엔 꼭 찾아 뵐려구 했는데, 강 서방의 직장일 때문에 또 못 가게 되었어요. 서운하시죠?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지만 왜 서운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아버지. 저희 집 사정이 그런걸 어쩌겠어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휴일을 마다하고 억척을 부리는 강 서방의 마음을 잘 아는 저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강 서방의 우직한 성격을, 자신의 건강한 몸을 믿고 오늘보다 내일을 기다리자는 그 성실한 마음에 투정도 할 수 없는 저입니다. 이렇게 혼자서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어요. 금이야 옥이야 오직 저 하나 이 세상 낙으로 삼으셨던 아버지의 그 마음.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는지 저는 잘 알잖아요. 제가 시집가는 날 저 도적놈이 남의 전 재산 훔쳐 간다고 그려셨잖아요. 평생 교육에 종사하셨던 분이 그러시는 걸 남들은 웃었지만 저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울었어요.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 끝나고 말씀하셨죠. 그동안 사시던 집을 정리하시고 남은 금액을 강 서방한테 주면서 조그만 사업이라도 해보라고 하셨죠. 그때 강 서방이 눈물로 사양하던 걸보고 저는 느꼈어요. 아버지만큼 믿을 수 있는 신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신랑이 어디에 있겠어요. 한국에서나 이곳 한인 사회서나 처가 집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처가 집에서 사업자금 도와 주지 않는다고 부인을 폭행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판국인데 장인이 주는 큰 금액을 제발 거두어 달라고 하던 강 서방의 간청. 어렵고 힘들지만 혼자서 이루어 나가겠다고 하는 굳은 의지에 아버지도 감동하셨잖아요.
아버지. 지금 서운하신 마음. 굳고 강한 사위의 장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조금 탕감해 주세요. 가을 추수 감사절엔 꼭 찾아뵙겠어요. 인생에 있어서 기다리는 건 인간이 성숙해질 수 있는 미덕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버지! 이렇게 말을 해도 미안하고 죄스럽고 또......"
미숙은 편지를 쓰다말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강 서방이 밤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았다. 미숙은 깊은 잠이 들었는지 입을 헤 벌리고 코까지 골았다. 코고는 소리도 고운 음악처럼 들렸다. 아내를 바로 눕히고 이불을 여미어 주었다. 편지를 읽었다. 강 서방은 편지를 읽고 눈을 감고 한참 넋을 잃고 그냥 앉아 있었다. 아내가 고맙고 정말 고마웠다. 강 서방은 아내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으로 결혼 후 처음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놀라면서 행복한 아침식사를 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 서방은 피곤한지도 모르고 도마질을 하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마음을 다졌다.
부부의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마음으로 당신을 지켜줄 꺼야. 누구도 알 수 없는 내 사랑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강 서방 입에서 계속 즐거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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