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집은 중국 길림성 용정 시내에서 약 사십여리 거리의 지신진 명동촌 산골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집 뒤는 소나무가 들어찬 높지 않은 산이고 앞은 확 트인 산자락으로 그 너머 멀리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이곳과 마주 보며 솟아 있었다. 마침 코스모스가 만발한 청명한 가을철이어서 방문자를 이런 저런 상념들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용정은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연길에서 50여 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어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20분이면 연길공항에 닿을 수 있어 한국에서 윤동주 생가까지는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시간이니 우리 선조들이 망국의 한을 품고 타국 땅을 떠돌다 터를 잡고 살았던 옛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의 윤동주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본채, 헛간, 기념관 등 모두 세 동으로 되어있다. 초입에 있는 옛 교회당이었던 건물은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관리인이 부재중이라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그 옆 생가와의 사이에는 나무 뚜껑을 덮은 큰 우물이 있으며 생가는 마루로 연결된 중규모의 5칸짜리 기와집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방문이 열려있어 안을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유물들은 전시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마루 오른쪽 맨 끝에 큼직한 모금함이 덜렁 놓여있어 다소 볼 품 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런 방법밖에 없었을까? 생가 왼쪽으로는 바짝 붙어 생가 복원 기념비가 필요이상 크게 세워져 있고 그 옆 건물은 헛간으로 창고나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그 헛간을 끼고 뒤로 돌아가니 빈터에 나무로 지어진 낡은 재래식 변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불견이란 말인가? 변소 문이 반쯤 떨어져 비스듬히 매달려있는 것이었다. 보기도 흉했지만 무엇보다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 변소는 연길의 호텔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조그마한 일조차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마치 과거의 소중한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비통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뒤이어 작금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태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역사의 진정한 가치는 단지 과거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외형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잘못을 깨달아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정신적 유산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영국 속담에 ‘바보란 똑같은 일을 두 번 되풀이 하는 사람’ 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이 어떻게 이처럼 살게 되었는지 가리지 못하고 나라의 기본인 정체성마저 뒤엎는가 하면 심지어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을 편들고 있는 행위까지 버젓이 자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대성 중학교(옛 용정 중학교)의 역사 전시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일단의 중년여성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윤동주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일본 관광객들이었다.
조만연 /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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